晉山世稿序

 

一日晉山君求書曰父兄見背願膳於世形影疇偯吾家先祖父曁先兄俱有父名皆不置槀每念顯敭之術其道無由華搜淂詩文善于衰爲一帙名曰晉山世藁頃徑高靈寧城兩相淸乎券端俱已下華苐念先君平素景仰高風欽慕德義詩諸子孫者雄公而已華賜一言以侈遺藁以伸平昔之義余蒙辱公知遇三復遺藁不勝感滄維以手拙辭夫水之源遠者其流或長木之根深者枝葉必茂公之先世積德毓慶名卿鉅公前後相望余維不及見通亭公今觀其遺藁則其文章事業盖可想已昔玩易齋嘗爲大司憲予忝執義及事左右公英睿節倫博雅好古經史子慶不貫穿所見益高所造益流所著詩文高古簡素無一點塵雄片簡尺牘不旨道俗下字家居不理生産左右築書澹如也遇知

世宗特蒙  寵願行將六用世世公輔期之詩文特其餘事耳  公若仁齋服膺庭訓學問精硏文章典雅書畵絶妙獨步一時然公之文章學術多爲書畵所掩人或鮮知公雅性怙退不樂榮進位不端德享年不永橫載巷觀自古奕世相承以文章檀名流芳千載者雄宋之三蘇而巳然光蘇之文稍有縱橫之有東坡之詩多涉顯謗未免湲世之譏議今觀是集憂國憂灵之誠溫柔敦厚之意藹然謚於言外噫盛재晋山相公先紹先列早權壯元再초勳용爲國柱石先世積累餘慶大顯於公而功名富貴奕萃於公之一身自非源遠根深德厚流光資其純若是乎公怨其先世詩文堙滅不傳將欲銀梓以面永久吾公其先世德業文章靈久靈顯垂耀問柱而永世不朽也無躅矣是集之傳於屬如寏待余言재蓬原鄭昌孫序

 

 

      진산세고서(晉山世稿序)

 

하루는 진산군(晉山君 : 姜希孟)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형이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형님은 모두 글을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 문집(文集)을 만들지 못해 매양 드러내어 빛내려고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다행히 시문(詩文) 약간 편을 찾아내어 책 한 질을 만들어 진산세고(晉山世稿)라 이름 붙이고 얼마 후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冑)와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두 정승의 서문을 받았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선부군(先府君)께서 평소 높은 풍도와 덕의(德義)를 높이 받들어야 한다고 여러 자손에게 말한 분은 오직 공(公)뿐이었으니 한 말씀 써서 유고(遺稿)를 빛나게 하고 평소의 의리를 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강공(姜公)의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이제 그 유고를 읽어보니 감개무량하여 글을 잘못한다고 사양하기가 어렵다.

 

대저 근원이 먼 물은 그 흐름이 반드시 길게 마련이고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지와 잎이 반드시 무성하게 마련이다. 공의 선세에서 덕(德)을 많이 쌓아 여경(餘慶)이 이어져 유명한 공경(公卿)이 전후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비록 통정공(通亭公:姜淮伯)을 뵙지 못했으나 지금 그 유고를 읽어보니 그분의 문장(文章)과 사업을 상상할 수가 있겠다. 옛날 완이재(玩易齋:姜碩德)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내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좌우에서 모셨는데 공은 영리함이 절륜하고 널리 알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자집(子集)을 꿰뚫지 못한 것이 없어 소견이 더욱 높고 조예(造詣)가 더욱 깊었다.

 

지은 시문은 예스럽고 간결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어 비록 짧은 조각 글이라도 세속을 따르지 않았다. 평소 집에 있으면서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으면서 좌우에 책을 쌓아놓고 읽으셨다. 세종(世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장차 크게 쓰려고 하여 세상에서 공보(公輔)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니 시문은 여사(餘事)였을 뿐이다.

 

인재(仁齋:姜希顔)에 이르러서는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이 정미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였으며 서화(書畵)가 절묘해서 한 세상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공의 문장과 학문은 서화에 가려서 아는 사람이 드물다. 공은 성품이 단아하고 깨끗하여 벼슬길에서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지위가 덕(德)에 차지 않았는데 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역사에서 보건대 예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백세에 향기를 전한 자는 오직 송(宋)나라 삼소(三蘇)가 있을 뿐인데 아버지 소순(蘇洵)의 문장은 종횡(縱橫)의 기운이 있고 아들 동파(東坡)의 시는 헐뜯는 바가 많아서 후세 사람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 이 문집을 보건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넘쳐서 온유(溫柔) 돈후(敦厚)한 뜻이 말마다 넘쳐나니 아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겠다.

 

진산상공(晉山相公)은 선대의 덕을 이어 일찍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공신(功臣)에 책봉되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선세에서 쌓아온 여경(餘慶)이 공에게 와서 크게 나타나고 공명(功名)과 부귀(富貴)가 공 한 몸에 다 모였으니 근원이 멀고 뿌리가 깊으며 덕이 두터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선세의 시문이 인멸(湮滅)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장차 인쇄하여 오래 전하려고 하는데 나는 그 선세의 덕업(德業)과 문장이 오래도록 빛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 않으니, 이 문집이 후세에 전하는 것이 어찌 내 말을 기다려서이겠는가?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 서(序)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