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 부원군 정창손의 졸기
성종 199권, 18년( 1487 정미 / 명 성화(成化) 23년) 1월 27일 무진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와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정창손의 자(字)는 효중(孝中)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인데, 중추원사(中樞院使)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영락(永樂) 계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선덕(宣德) 병오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곧 집현전 저작랑(集賢殿著作郞)으로 옮기고 여러 번 승진하여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정통(正統) 신유년에 사섬서 령(司贍署令)에 제수되고, 임술년에는 승진하여 시전장 부정(試典醬副正)에 임명되었다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옮겼다. 을축년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임명되어 강개(慷慨)하게 곧은 말을 하였고, 병인년에는 언사(言事)로 좌천되어 군기 부정(軍器副正)이 되었다. 정묘년에는 직예문관(直藝文館)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제수되었고, 무진년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여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수하는데 참여하였다.
경태(景泰) 경오년에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옮기고 신미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조정의 기강(紀綱)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임신년에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기고, 계유년 세조 정난(世祖靖難)에 뽑혀서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고, 갑술년에는 자급이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가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고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받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으며, 병자년 에는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때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난(亂)을 꾀하자, 정창손이 변(變)을 고(告)하여 경절 공신(勁節功臣)의 칭호가 더 내려지고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이었다.
곧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올랐다가 천순(天順) 정축년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올랐다. 무인년에는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예(例)에 부인은 정조(停朝)가 없었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조시(朝市)를 하루 정지하여 특별한 은혜를 보였다.
장사지냄에 미쳐 정창손이 묘려(墓廬)에 있고 한 번도 사가(私家)에 오지 아니하였는데, 세조가 듣고 직제학(直提學) 서강(徐岡)을 보내어 내온(內醞)과 소찬(素饌)을 내려 주었으며, 서울 집에 있고 묘려(墓廬)에 돌아가지 말도록 하였으나 예전대로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세조가 장차 평안도에 거둥하려고 하면서 정창손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하려고, 특별히 기복(起復)하여 영의정(領議政)을 삼았으나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자, 어서(御書)로 유시(諭示)하기를, “나에게 경(卿)은 좌우의 손과 같으니 장차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기복(起復)하도록 하겠다.” 하고, 갑자기 순행(巡幸)을 정지하였는데, 정창손이 또 전문을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경진년에 복(服)을 마치자 세조가 내전(內殿)에 불러 들여서 위로 하고, 단의(段衣) 한 벌을 내려 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신사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임오년에 어떤 사건으로 여산군(礪山郡)에 귀양갔으나 곧 불러서 부원군에 봉해지고 특별히 잔치를 내려 위로해 주었다. 성화(成化) 무자년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남이(南怡) 등을 죽일 적에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칭호가 내려 지고, 기축년에 임금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였다.
신묘년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命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받고 나이가 70인 까닭으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진년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을미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을사년에 늙었다고 하여 사직하고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6세이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인데, 임금을 섬김에 절의를 다한 것이 충(忠)이고, 도(道)를 곧게 지키고 굽히지 아니한 것이 정(貞)이다. 아들은 정개(鄭价)·정칭(鄭偁)·정괄(鄭佸)이고 사위는 김질(金礩)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정창손은 천성이 조용하고 소탈하여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였으며 집에 사는 것이 쓸쓸하고 뇌물을 받지 아니하여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감히 사사로이 간청하지 못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켜 정승이 된 지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처음부터 끝가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나이가 많아지자 정신이 혼란하여 일을 의논할 때에 비록 더러 착오는 있었으나 조금도 임금의 뜻에 맞추어 아부하는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 매양 조정의 모임에서 기거 동작하는 데에 넘어지면서도 오히려 사직(辭職)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가만히 비난하였다.”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전교하기를, “청빈(淸貧)한 재상이니, 부물(賻物)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영인본】 11 책 18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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