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

有明朝鮮國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

부의정부영의정봉원부원군겸영  경연사  증시충정정공신도비명병서     

夫議政府領議政蓬原府院君兼領  經筵事  贈諡忠貞鄭公神道碑銘幷序     

 

성악정령지기종어인이위명세호걸지재개기숙지정강이위전설위상량필숭

星嶽精靈之氣鍾於人而爲命世豪傑之才盖箕宿之精降以爲傳說爲商良弼崇

악지령강이위신백위주현좌구지어금봉원정충정공필량  오조공명훈렬지

嶽之靈降而爲申伯爲周賢佐求之於今蓬原鄭忠貞公弼亮  五朝功名勳烈之

성가이백중어전신기여성재공휘창손자효중황증조휘량생중대광봉원부원

盛可以伯仲於傳申掎歟盛哉公諱昌孫字孝仲皇曾祖諱良生重大匡蓬原府院

군황조휘부가선대부한성부윤  증의정부좌찬성황고휘흠지자헌대부중추

君皇祖諱符嘉善大夫漢城府尹  贈議政府左贊成皇考諱欽之資憲大夫中樞

원사시문경공  증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래산부

院事諡文景公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萊山府

원군황비정경부인최씨전주망족형조전서병례지녀이임오삼월갑오생공생

院君皇妣貞敬夫人崔氏全州望族刑曹典書丙禮之女以壬午三月甲午生公生

이기도여범아향리급장취학박문강기기독서능문장계묘중사마시선덕병오

而器度與凡兒逈異及長就學博聞强記嗜讀書能文章癸卯中司馬試宣德丙午

중제보승문원정자아천수집현전저작랑력박사수찬전지교리개대경연지제

中第補承文院正字俄遷授集賢殿著作郞歷博士修撰轉至校理皆帶經筵知製

교세종설집현전치원이십인초선일시문학지사충지비고문연륜발고보화전

敎世宗設集賢殿置院二十人抄選一時文學之士充之備顧問演綸綍高步花磚

닐승예권시인의지등영주세종상류의어자치통감위기전석미진구독불명명

昵承睿眷時人擬之登瀛洲世宗甞留意於資治通鑑謂其箋釋未盡句讀不明命

문사찬훈의개재학식감지사분과책성번열주복각진소장이찬수지공공실거

文士撰訓義皆才學識鑑之士分科責成繙閱紬復各盡所長而纂修之功公實居

다기미정외우복결수사첨사령승집현전응교대경연춘추관우명문사취어집

多己未丁外憂服闋授司瞻寺令陞集賢殿應敎帶經筵春秋館又命文士聚於集

현전찬상자당우삼대하지송원급아국성제명왕명신석보선정선교가위후세

賢殿撰上自唐虞三代下至宋元及我國聖帝明王名臣碩輔善政善敎可爲後世

법자편위거질범수백권명왈치평요람찬수지공공역거다세종말년초위예

法者編爲巨秩凡數百卷名曰治平要覽纂修之功公亦居多世宗末年稍違豫

문종재동저시사조관언사자필상봉장내달시공여이문열공계전재집현전루

文宗在東邸視事朝官言事者必上封章乃達時公與李文烈公季甸在集賢殿屢

봉장극론시정득실유일이동렬지지왈자고희론사자종필함화황시종강론덕

封章極論時政得失有一二同列止之曰自古喜論事者終必陷禍况侍從講論德

의계옥보도이기지어간쟁비직공여문렬대소왈인각유심론사지패지영불여

義啓沃輔道而己至於諫諍非職公與文烈大笑曰人各有心論事之敗之榮不如

함묵지치지심수률하료항소극진여수십상  세종가지을축탁사헌부집의강

含默之耻之深遂率下僚抗疏極陳餘數十上  世宗嘉之乙丑擢司憲府執義慷

개골경지무불언전차공지백씨정절공갑손장헌부격탁양청직도불요풍절름

慨骨骾知無不言前此公之伯氏貞節公甲孫長憲府激濁揚淸直道不撓風節凛

연인비지독격골금공정색립조건악량직유내형풍일시물론다지병인이언사

然人比之獨擊鶻今公正色立朝謇諤亮直有乃兄風一時物論多之丙寅以言事

천좌위군기부정이직예문관정묘중복시수집현전직제학겸경연춘추관무진

遷左爲軍器副正移直藝文館丁卯中覆試授集賢殿直提學兼經筵春秋館戊辰

오월탁부제학관직여구  세종명신정인지등찬수고려사공이편수관전장편

五月擢副提學館職如舊  世宗命臣鄭麟趾等撰修高麗史公以編修官專掌編

차불행서미 진어이척하 문종명사국필찬공익근불태경오탁수승정원좌부

次不幸書未進御而陟遐  文宗命史局畢撰公益勤不怠庚午擢授承政院左副

승지겸지예조사전지우출납유윤팔월진고려전사사안마표리신미배사헌부

承旨兼知禮曹事轉至右出納惟允八月進高麗全史賜鞍馬表裡辛未拜司憲府

대사헌계가선대진대강론사절지불피권귀인개외탄왈전일박격정중승금복

大司憲階嘉善大振臺綱論事切至不避權貴人皆畏憚曰前日博擊鄭中丞今復

위헌장의겸세자좌부빈객임신천예문제학동지춘추관찬  세종문종실록사

爲憲長矣兼世子左副賓客壬申遷藝文提學同知春秋館撰  世宗文宗實錄賜

안마현능척하유충재립권간용사국세의위공봉공수정계유십월  세조병기

鞍馬顯陵陟遐幼冲在立權奸用事國勢疑危公奉公守正癸酉十月  世祖炳幾

정난위좌우왈당금지시직량간정무여정모자탁위이조판서승자헌공지조감

靖難謂左右曰當今之時直亮簡正無如鄭某者擢爲吏曹判書陞資憲公之藻鑑

청식견별품제개득기의성우렴결수권세혁연이문정소색관절불도사림탄복

淸識甄別品題皆得其宜性又廉潔雖權勢赫然而門庭蕭索關節不到士林歎服

을해  세조즉위위정부대신의용독서계고지대체자탁공위의정부좌찬성겸

乙亥  世祖卽位謂政府大臣宜用讀書稽古持大軆者擢公爲議政府左贊成兼

판이조책훈좌익공신삼등봉봉원군병자육월성삼문등잠모부궤공지기모상

判吏曹策勳佐翼功臣三等封蓬原君丙子六月成三問等潛謀不軌公知其某上

섭당시시역당반결화난지작불조칙석뢰공전제무유아어간자책훈  좌익이

燮當是時逆黨盤結禍難之作不朝則夕賴公剪除無有芽於間者策勳  佐翼二

등가보국숭록대부봉원부원군겸성균관대사성  세자이사개전문형야십월

等加輔國崇祿大夫蓬原府院君兼成均館大司成  世子貳師盖典文衡也十月

탁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정축승위좌시대부인년고구질공지성영

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丁丑陞爲左時大夫人年高九袟公至誠榮

양수융동성서불폐정성조알지가필구관대배시좌우환흔이열대부인평반일

養雖隆冬盛暑不廢定省朝謁之暇必具冠帶陪侍左右歡欣怡悅大夫人平反一

소연후퇴일국개칭기효무인정우애훼과절  세조견근신적위부증유가특정

笑然後退一國皆稱其孝戊寅丁憂哀毁過節  世祖遣近臣吊慰賻贈有加特停

조시일일전차부인무정조지예차소이중공시리은야급장여묘불지사제  상

朝市一日前此婦人無停朝之例此所以重公示異恩也及葬廬墓不至私第  上

견관위유오십후기력점쇠신물여묘  세조장순행평안도기복위영의정류수

遣官慰諭五十後氣力漸衰愼勿廬墓  世祖將巡幸平安道起復爲領議政留守

경도상전사불윤우견도승지조석문위해지공고사어찰왈자지어경유좌우수

京都上箋辭不允又遣都承旨曺錫文慰解之公固辭御札曰子之於卿猶左右手

가여일수안일호부안수집타면유소접물칙부수기능자이위불안이이환어신

假如一手安一乎否安手執他面有所接物則否手其能自以爲不安而貽患於身

호대의여차불필다언약불득칙장률백관친왕기복량상체차공유불취직아정

乎大義如此不必多言若不得則將率百官親徃起復良相體此公猶不就職俄停

순행경진복결  상인입내전천어온순정녕관지사의일습봉봉원부원군신사

巡幸庚辰服闋  上引入內殿天語溫諄丁寧款至賜衣一襲封蓬原府院君辛巳

배영의정부사영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임오오월이사적여산군미기소환

拜領議政府事領藝文館春秋館事  世子師壬午五月以事謫礪山郡未幾召還

복봉봉원부원군을유명제유분수사서오경정구결공수상서의론통창다척전

復封蓬原府院君乙酉命諸儒分授四書五經定口訣公授尙書議論通暢多摭前

유소미발무자  예종즉위책정난익대공신아  전하즉조이공숙덕기애일사

儒所未發戊子  睿宗即位策定難翊戴功臣我  殿下即祚以公宿德耆艾日仕

정원참결서무위지원상겸영경연신묘  사좌리공신심이칠십걸치사불윤임

政院叅決庶務謂之院相兼領經筵辛卯  賜佐理功臣尋以七十乞致仕不允壬

진견신  사궤장을미배영의정지시공삼위수상진신사대부상여경어조왈선

辰遣臣  賜几杖乙未拜領議政至是公三爲首相縉紳士大夫相與慶於朝曰善

인복상의공이성만루걸사  상왈삼공지중비여경노성무이진지불윤공거묘

人復相矣公以盛滿屢乞辭  上曰三公之重非如卿老成無以鎭之不允公居廟

당수신정홀부동성색흘여산악년부구질조정시구무출기우인비지송승상문

堂垂紳正笏不動聲色屹如山嶽年俯九袟朝庭蓍舊無出其右人比之宋丞相文

언박운을사고사봉부원군정미구질  상명사약이견내의진시문신불절정월

彦博云乙巳固辭封府院君丁未遘疾  上命賜藥餌遣內醫診視問訊不絶正月

무진졸우정침향년팔십유육  상진도타루량구진소찬철조시삼일견중사임

戊辰卒于正寢享年八十有六  上震悼墮淚良久進素饌輟朝市三日遣中使臨

적  상왈봉원가소청빈범상장소핍구유첩문모사유결부  증배가태상역명

吊  上曰蓬原家素淸貧凡喪葬所乏具由輒聞母使有缺賻  贈倍加太常易名

충정문공지졸사림막불통도왈현재상망의지어우동마졸막불탄석공자성간

忠貞聞公之卒士林莫不痛悼曰賢宰相亡矣至於牛童馬卒莫不嘆惜公資性簡

엄고매렴공정직학문해박문장전아필법절묘위일대지관평생불사산업수위

嚴高邁廉公正直學問該博文章典雅筆法絶妙爲一代之冠平生不事産業雖位

극인신거가색연거관이사명백정대증유무소애청알부득행인불감간이사우

極人臣居家索然居官履事明白正大贈遺無所愛請謁不得行人不敢干以私友

어형제신어붕우친척고구상장혼인무불진휼접인이공수하사지천유래후자

於兄弟信於朋友親戚故舊喪葬婚姻無不賑卹接人以恭雖下士之賤有來候者

필어문외송영천성연야  세조심가권주상왈여지경경무리숙부공여진작

必於門外送迎天性然也  世祖深加眷注甞曰予之敬卿無異叔父公如進爵

상필개용하어좌왈차왕비군신대의내전사례야잉선유재좌군신공성불능주

上必改容下御座曰此王非君臣大義乃展私禮也仍宣喩在左群臣公性不能酒

좌  상위설예필친상사지지년심난어추배혹명면배상전기존례경중여차공

座  上爲設醴必親甞賜之至年深難於趨拜或命免拜上殿其尊禮敬重如此公

립조육십이년주시위자수십장전형자사년삼위수상계국가경중자삼십여년

立朝六十二年主試圍者數十掌銓衡者四年三爲首相係國家輕重者三十餘年

거총사위극전종시공명복록지성금고무비거국개칭도덕지수배청풍군부인

居寵思危克全終始功名福祿之盛今古無比擧國皆稱道德之首配淸風郡夫人

정씨승녕부소윤지지녀생삼남사녀장왈개첨지중추차왈이첨지중추차왈괄

鄭氏承寧府少尹持之女生三男四女長曰价僉知中樞次曰儞僉知中樞次曰佸

중을유과위의정부좌의정녀장적병조판서이화차적상락부원군김질차적조

中乙酉科爲議政府左議政女長適兵曹判書李樺次適上洛府院君金礩次適趙

윤벽차적최지첨지취군수홍서종지녀생이남이녀남장주함주부차계함사정

允璧次適崔漬僉知娶郡守洪瑞從之女生二男二女男長奏咸主簿次啓咸司正

녀장적사과이극문차적효력부위윤검차첨지취사용최계겸지녀무자찬성취

女長適司果李克文次適効力副尉尹儉次僉知娶司勇崔季謙之女無子贊成娶

부사이결지녀생일남왈종보봉사녀삼장적봉사이희익차적직장심형차적참

府使李潔之女生一男曰宗輔奉事女三長適奉事李禧益次適直長沈浻次適叅

봉윤첩상락생오남왈의동첨추왈예동주부왈지동첨정왈성동현감왈이동사

奉尹堞上洛生五男曰義童僉樞曰禮童主簿曰智童僉正曰誠童縣監曰利童司

과녀일종실부림군식최지생이남왈치현영왈융감찰녀적부장윤초첨정생이

果女一宗室富林君湜崔漬生二男曰緇縣令曰瀜監察女適部長尹超僉正生二

남왈영왈규생원녀장적생원이시찬차적여승감차적유학박성형차적장사랑

男曰瑛曰珪生員女長適生員李詩讃次適呂承堪次適幼學朴成亨次適將仕郞

이장원여유증현손칠십여인시년사월임신장우광주지서방이동계좌정향지

李長源餘幼曾玄孫七十餘人是年四月壬申葬于廣州之西芳桋洞癸坐丁向之

원부인선공졸영역재서강상거불과백여보기장명년무신정월제고욕립신도

原夫人先公卒塋域在西崗相踞不過百餘步旣葬明年戊申正月諸孤欲立神道

비색명어거정오호거정상인명제거정중무신진사등정축복시개출공문하공

碑索銘於居正嗚呼居正尙忍銘諸居正中戊申進士登丁丑覆試皆出公門下公

지재집현전거정도참말석자수년급공지삼입묘당거정삼위참찬재위찬성첨

之在集賢殿居正叨叅末席者數年及公之三入廟堂居正三爲叅贊再爲贊成忝

료이자육장십년반부기미어공지덕지풍획문서여복응경모금칙산퇴양괴무

僚貳者六將十年攀附驥尾於公之德之風獲聞緖餘服膺景慕今則山頹梁壞無

복가앙오호애재명왈

復可仰嗚呼哀哉銘曰

천지인온규벽정형공내정생공우비영광풍제월활호심흉태산북두외호의용

天地絪縕奎璧晶熒公乃挺生公又蜚英光風霽月豁乎心胷泰山北斗巍乎儀容

조제창진풍호운룡력사오조천재기봉천양대관등김보옥삼장암랑사도린각

早際昌辰風虎雲龍歷事五朝千載奇逢踐揚臺館登金步玉三長巖廊四圖獜閣

우모찬양경륜보불이정이독내설내시하적불가시조이의기구노성로국기인

訏謀贊襄經綸黼黻以亭以毒乃設乃施何適不可時措而宜耆舊老成潞國其人

공명종시분양기윤왈봉기상비구이신인사주석국의염매하천불칙거이산퇴

功名終始汾陽其倫曰鳳其祥匪龜而神人思柱石國倚塩梅何天不慗遽爾山頹

위감수토한여가의왈충왈정소재시뢰유울광능유절현궁유숭자비유성풍풍

魏鑑雖土漢礪可倚曰忠曰貞昭載諡誄有欝廣陵有截玄宮有崇者碑有聲渢渢

    순성명량좌리공신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舘大提

    학지  경연춘추관성균관사서거정찬

    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徐居正撰

    홍문관부교리금수동서병전

    弘文館副校理金壽童書並篆

 

근안충정공신도비달성서공거정서약명홍문관부교리김공수동서병몽실홍

謹按忠貞公神道碑達城徐公居正序若銘弘文館副校理金公壽童書並蒙實弘

치무신소건야계연산갑자추구  선능폐비시사대신종신무론존몰구치극전

治戊申所建也洎燕山甲子追仇  宣陵廢妣時事大臣從臣無論存沒俱置極典

공역여언어시공지하세기십유팔년의화급천양묘도의물병피추쇄오호참의

公亦與焉於是公之下世己十有八年矣禍及泉壤墓道儀物並被搥碎嗚呼慘矣

중묘용흥수명긍록범가이세유명지원자무소불용기극이독신도비미극재건

中廟龍興首命矜錄凡可以洗幽明之寃者無所不用其極而獨神道碑未克再建

행려초목지점차탄이기금년춘공지외오대손영의정이공원익초자적중복기

行旅樵牧指點嗟嘆而己今年春公之外五代孫領議政李公元翼初自謫中復起

위상정혁지여내위공지훈명사업휘영오동백년재주신도무징위궐자손자녕

爲相鼎革之餘迺爲公之勳名事業輝暎吾東百年纔周神道無徵爲厥子孫者寧

불어상유자달성지문기재원고중모입석이도수영불역가호좌찬성이공시언

不於顙有泚達成之文旣載元稿重謀入石以圖垂永不亦可乎左贊成李公時彦

관찰사심공열병조참판신공경진이조참의최군오길동부승지김군결 결  기준

觀察使沈公悅兵曹叅判申公景禛吏曹叅議崔君嗚吉同副承旨金君缺 缺  曁浚

겸동몽지수이기기역금동중추이공신의증재수양위시사벌석수우강이전군

謙同蒙指授以起其役今同中樞李公愼儀曾宰首陽爲是事伐石輸于江以前郡

수이군승형간사유성거시역부지시구공지외예야우유성손경창거재묘하실

守李君升亨幹事有誠擧是役付之是俱公之外裔也又有姓孫慶昌居在墓下實

주감동개수상위지경기언내외제손관면심성각연전백이위지비차심공선서

主監蕫皆首相爲之經紀焉內外諸孫官冕甚盛各捐錢帛以爲之費且沈公善書

해자수속필간석잉령준겸기기사여우경화지후개복신영역계좌정향지원

楷字遂屬筆刊石仍令浚謙記其事如右經禍之後改卜新塋亦癸坐丁向之原

    외육대손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서평부원군한준겸찬

    外六代孫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韓浚謙撰

    외육대손정헌대부지중추부사겸경기도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개성류

    外六代孫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京畿道觀察使兵馬水軍絶度使開城留

    수도순찰사심열서병전

    守都巡察使沈悅書並篆

    천계삼년십월    일립

    天啓三年十月    日立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군성명량경제좌리공신(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겸연경연사(兼領經筵事) 증시충정(贈諡忠貞) 정공(鄭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별과 산악(山嶽)의 정기(精氣)가 사람에게 모이면 세상에 뛰어난 호걸스런 인재가 나오게 마련이니 기수(箕宿)의 정기가 내려와 부열(傅說 :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현신)이 태어나 상(商)나라의 훌륭한 재상이 되었고 숭악(崇嶽)의 정령이 내려와 신백(申伯)이 태어나 주(周)나라의 어진 보좌가 되었다.지금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구하면 바로 봉원부원군 정충정(鄭忠貞) 공이 다섯 조정에 걸쳐 보필한 성대한 훈업(勳業)이 부열이나 신백과 맞먹을 것이니 아 훌륭하다고 하겠다.

공의 휘(諱)는 창손(昌孫)이요 자(字)는 효중(孝仲)이며 증조 휘 양생(良生)은 중대광(重大匡)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이요 할아버지 휘 부(符)는 증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이요 아버지 휘 흠지(欽之)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事) 시문경공(諡文景公)으로 순성적덕보조공신(純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에 봉해지고,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최씨(崔氏)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 형조전서(刑曹典書) 병례(丙禮)의 따님인데 임오(壬午) 三월 갑오일(甲午日)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도(器度)가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달랐으며 자라서 취학(就學)하면서는 박문강기(博文强記)하고 독서를 좋아해 문장을 잘했다.계묘(癸卯)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선덕(宣德) 병오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후 집현전저작랑(集賢殿著作郞)을 제수해 박사(博士) 수찬(修撰)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르렀는데 모두 경연지제교(經筵知製敎)를 겸대(兼帶)했다.세종(世宗)께서 집현전을 설치해 당시의 문학(文學)을 잘하는 선비 二○명을 뽑아 채워 고문(顧問)에 대비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등영주(登瀛洲)에 비교했다.세종께서 일찍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여 그 주석(註釋)이 미진하고 구두(句讀)가 분명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시어 집현전의 문사(文士)들에게 훈의(訓義)를 지으라고 명했는데 모두 학식이 뛰어나고 감식(鑑識)이 있는 선비들을 모아 분과(分科)별로 책임지고 완성해 가기 소장(所長)대로 극진히 하게 했는데 공이 찬수(撰修)한 공로가 많았다.미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했으며 복제(服制)를 마치고 사섬시령(司贍寺令)을 제수해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승진해서 경연춘추관(經筵春秋館)을 겸대했는데 임금이 또 문사들을 집현전에 모아 위로 당우(唐虞) 삼대(三代) 때부터 아래로 송(宋)나라 원(元)나라 및 우리나라의 성제(聖帝) 명왕(明王) 명신(名臣) 석보(碩輔)로 정사를 잘하고 가르치기를 잘하여 후세에 본받을 만한 자는 뽑아 책을 편찬하게 하니 수백 권의 거질(巨帙)이 되어 책이름을 치평요람(治平要覽)이라고 했는데 공의 공로가 많았다.세종께서 말년에 자주 병환이 나시어 문종(文宗)이 동궁(東宮)으로 정사를 보았는데 조정 관원으로 언사(言事)하는 자들이 반드시 글을 올려 시폐(時弊)를 진달했다.공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과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자주 글을 올려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극론(極論)하려고 하니 한두 동료들이 말리기를 「예로부터 일을 논하기 좋아한 자는 마침내 화(禍)를 당하고 말았으며 더군다나 시종신(侍從臣)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잘 보좌하면 되지 간쟁(諫諍)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직책이 아니다.라고 하니,공과 문열공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기 다르다.일을 논하다고 실패한 영광(榮光)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수치보다 낫다.하고는 마침내 하료(下僚)들을 거느리고 수십 차례 상소하니 세종께서 매우 가상하게 여시셨다.

을축년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발탁되어서는 강개(慷慨) 강직하여 아는 일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전에 공의 백씨(伯氏) 정절공(貞節公) 갑손(甲孫)이 헌부(憲府)의 장(長)이 되어 선한 자를 올리고 악한 자를 내치는 등 강직한 도리로 흔들리지 않아 풍도가 늠름해서 사람들이 사나운 송골매에 비유했었는데 이제 공이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강직하게 하여 형의 풍도를 지니자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병인년에 언사(言事)롤 좌천(左遷)되어 군기부정(軍器副正)이 되었다가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옮겼다.정묘년 복시(覆試)에 합격해 집현전직제학 겸경연춘추관(集賢殿直提學兼經筵春秋館)을 제수하였다.무진년 五월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했는데 춘추관 직책은 그대로였다.세종께서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라 명하셨는데 공이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편차(編次)를 전담했는데 불행히 올리지 못하여 임금이 승하하시자 문종(文宗)이 사국(史局)에 명하여 편찬을 마치도록 하므로 공은 더욱 부지런히 편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오년에 승정원좌부승지 겸지예조사(承政院左副承旨兼知禮曹事)를 제수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옮겼다.八월에 고려사(高麗史)를 올리니 안마(鞍馬 : 안장을 얹은 말)와 표리(表裏 : 옷을 지을 안감과 겉감)를 하사하였다.신미년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배했는데 품계(品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였다.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치고 일을 논함이 간절하고 곧아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전에 박격(搏擊)하던 정중승(鄭中丞)이 이제 다시 헌부(憲府)의 장(長)이 되었다.라고 하였다.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했다가 임신년 예문제학동지춘추관(藝文提學同知春秋館)으로 옮겨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문종실록(文宗實錄)을 편찬하니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端宗)이 즉위하고 권간(權奸)이 득세하여 나라 형세가 위태롭게 되었는데 공은 봉공(奉公)하면서 정도(正道)를 지켰다.

계유년 一○월에 세조(世祖)가 정난(靖難)하고서 좌우에게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강직하고 간정(簡正)한 사람으로는 정모(鄭某)만한 사람이 없다.하시고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발탁하니 품계는 자헌대부였다.공이 굳이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취임했다.공은 밝은 조감(藻鑑)과 식견으로 인물을 등용하니 모두 합당하게 되었으며 또 성품이 청렴개결하여 비록 권세가 빛났으나 집문 앞이 쓸쓸하여 뇌물을 받는 일이 없자 사림(士林)이 탄복하였다.기해년 세조가 즉위하여 「정부(政府) 대신은 마땅히 독서하여 고사(古事)를 상고하여 대체(大體)를 잘 아는 자를 임용해야 한다.」하고는 공을 의정부좌찬성 겸판이조(議政府左贊成兼判吏曹)로 발탁하고 좌익공신삼등(佐翼功臣三等)에 책훈(策勳)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했다.병자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겸성균관대사성 세자이사(兼成均館大司成世子貳師)를 가(加)하니 대개 문형(文衡 : 대제학)을 맡은 것이다.六월에 성삼문(成三問) 등이 몰래 역모(逆謀)를 꾸미려고 하자 공이 그 사실을 알고 고변(告變)했다.당시 역당(逆黨)들이 결속하여 화가 아침 아니면 저녁에 일어나게 되어 있었는데 공의 고변에 의해 싹트기 전에 남김없이 제거할 수 있어 좌익이등공신(佐翼二等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一○월에 대광보국승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발탁했다.정축년 좌의정으로 승진했는데 이때 대부인(大夫人)의 연세가 九9(旬)이셨는데 공은 지성으로 봉양하여 비록 한겨울이나 한여름 무더울 때에도 문안 올리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아간 여가에는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좌우에서 기쁜 안색으로 모시어 대부인께서 웃으신 연후에야 물러나오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孝誠)을 칭찬하였다.무인년에 모상(母喪)을 당해 슬퍼함이 절도를 넘었다.세조께서 근신(近臣)을 보내 조위(弔慰)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하게 하시고 특별히 하루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니 이전에는 부인(婦人)의 상에는 이런 예가 없었으니 이는 공에게 특별히 베푼 은혜였다.장례를 지낸 다음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집에 온 일이 없었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위로하기를 「五○세가 넘어서는 기력(氣力)이 쇠퇴하니 삼가서 여묘살이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세조께서 장차 평안도(平安道)를 순행(巡行)하려고 하면서 기복(起復 : 상중(喪中)에 특별히 나와 벼슬하게 하는 일)하여 영의정을 삼아 경도(京都)에 남아 지키게 하니 글을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으면서 승지 조석문(曺錫文)을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으나 공은 고사(固辭)하였다.그러자 어찰(御札)을 내려 말하기를 「경(卿)은 나의 좌우 손과 같다.만일 한 손을 빌려 주면 한 손이 편안하게 괸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물건을 잡을 수 있겠는가? 손이 편안치 못하여 몸에 근심을 끼쳐서야 되겠는가? 대의(大義)가 이러하니 여러 말할 것이 없다.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장차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어진 재상을 기복시킬 것이니 그리 알라.」하였으나 공은 나아가지 않았는데 얼마 후 후 순행하는 일을 정지했다.경진년에 복을 벗으니 임금이 내전(內殿)으로 불러 따뜻한 말로 간절하게 유시하고 옷 한 벌을 내리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을 습봉(襲封)하게 하였다.신사년에 영의정부사 영예문관 춘추관사 세자사(領議政府事領藝文館春秋館事世子師)를 제수하고 임오년 五월에 일 때문에 여산군(礪山郡)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소환(召還)되어 다시 봉원부원군에 봉해졌다.을유년에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나누어주면서 구결(口訣)을 정하게 했는데 공은 상서(尙書)를 받아 통창(通暢)하게 논의해 선유(先儒)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바가 많았다.무자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정난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우리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자 공이 숙덕(宿德) 원로대신으로 날마다 정원(政院)에 출사(出仕)하여 여러 일을 처결하니 원상겸영경연(院相兼領經筵)이라 불렀다.신묘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내렸으며 얼마 후 七○세가 되어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않았고 임진년에 신하를 보내 궤장(짙杖)을 하사하였다.을미년에 영의정을 제수하니 이번이 세번째 수상(首相)이 된 것으로 사대부들이 서로 조정에서 선인(善人)이 다시 상국(相國)이 되었다며 경하(慶賀)하였다.공이 너무 성만(盛滿)한 것으로써 여러 차례 사직하기를 비니 임금이 이르기를 「삼공(三公)의 중한 자리가 경처럼 노성(老成)한 사람이 아니면 조정을 진정(鎭定)시킬 수 없다.」하고는 윤허하지 않으셨다.

공은 조정에서 단정히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바로잡고 성색(聲色)을 산악처럼 움직이지 않았는데 나이가 九순(旬)이 넘어 조정의 원로로 공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어 송(宋)나라 승상(丞相) 문언박(文彦博)에게 비교했다고 한다.을사년에 고사(固辭)하니 부원군에 봉했다.정미년에 병환이 나자 임금이 약물(藥物)을 내리고 내의(內醫)를 보내 진찰하고 문안함이 끊어지지 않았다.정월 무진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八十六세이셨다.임금이 진도(震悼)하시어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시고 소찬(素饌)을 드시며 三일 동안 조시(朝市)를 열지 않으면서 중사(中使)를 보내 조문했다.임금이 이르기를 「봉원부원군의 집은 평소 청빈(淸貧)하여 모든 상장(喪葬)에 드는 물품이 부족할 것이니 하나하나 물어서 부족하지 않게 도와 주라.」하고는 부의를 배나 하였다.태상시(太常寺)에서 충정(忠貞)이라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사림(士林)이 모두 「어진 재상이 돌아가셨다.」하면서 애도하고 심지어 소치는 목동이나 마졸(馬卒)들 까지도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공은 성품이 간엄(簡嚴) 고매(高邁)하고 청렴 정직했으며 학문이 해박(該博)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필법(筆法)이 절묘한 것이 당시 제일이었다.살림을 일삼지 않아서 비록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사는 집이 쓸쓸했으며 관청 일은 명백 정대하게 처리 특별히 사랑하는 바가 없었고 청탁이 행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감히 사적인 청을 하지 못했다.형제간에 우애하고 친구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친척이나 벗의 상(喪)이나 혼인에는 두루 도와주었다.사람을 공손하게 접대해 비록 천한 아랫사람이 와서 문안하더라도 반드시 문밖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보냈으니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세조께서 깊이 권우(眷遇)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경을 공경하는 것은 숙부(叔父)나 다름이 없다.」하고 만일 공이 조정에 나아가면 임금이 반드시 용모를 고치고 어좌(御座)에서 내려오면서 이르기를 「이는 임금과 신하로서의 예(禮)가 아니라 사사로운 예이다.」라 하고는 좌우 여러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였다.공은 술을 마시지 못하여 술자리를 베풀 때면 반드시 단술을 준비해 내렸다. 나이가 많아서 나아가 절을 올리기 불편하면 혹 절을 하지말고 전상으로 올라오기를 명했으니 그 존경하고 예를 갖춘 것이 이러하였다.

공은 조정에 선 六二년 동안 과거(科擧)를 주관한 것이 수십 번이요 전형(銓衡)을 관장한 것이 四년이요 세번 수상(首相)을 지내고 나라의 경중(輕重)에 관계된 벼슬을 三○여 년 동안 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항상 위태로울 것을 생각하여 시종(始終) 잘 마쳐 그 공명(功名)과 복록(福祿)을 고금에 비할 바가 없었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으뜸가는 도덕군자(道德君子)라고 일컬었다.

배(配)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 정씨(鄭氏)는 승녕부소윤(承寧府少尹) 지(持)의 딸인데 三남四녀를 낳았다.장남 개(价)는 첨지중추(僉知中樞)요 다음 이(倞)는 첨지중추요 다음 괄(띱)은 을유년 과거에 급제하여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이 되었으며 장녀는 병조판서 이화(李樺)에게 다음은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괴)에게 다음은 조윤벽(趙允璧)에게 다음은 최지(崔漬)에게 출가하였다.첨지중추가 군수 홍서종(洪瑞從)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二녀를 낳았으니 장남 주함(奏咸)은 주부(主簿)요 다음 계함(啓咸)은 사정(司正)이요 큰딸은 사과(司果) 이극문(李克文)에게 다음은 효력부위(效力副尉) 윤검(尹儉)에게 출가했다.둘째 첨지는 사용(司勇) 최계겸(崔季謙)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녀가 없으며 찬성은 부사(府使) 이결(李潔)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종보(宗輔)를 낳으니 봉사(奉事)요 딸은 셋인데 장녀는 봉사 이희익(李禧益)에게 다음은 직장(直長) 심형(沈泂)에게 다음은 참봉(參奉) 윤첩(尹堞)에게 출가했다.상락은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의동(義童)은 첨추(僉樞)요 예동(禮童)은 주부(主簿)요 지동(智童)은 첨정(僉正)이요 성동(誠童)은 현감(縣監)이요 이동(利童)은 사과(司果)이며 한 딸은 종실(宗室) 부림군(富林君) 식(湜)에게 출가했다.최지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치(緇)는 현령(縣令)이요 융(瀜)은 감찰(監察)이요 딸은 부장(部長) 윤초(尹超)에게 출가했다.첨정이 아들 둘을 낳으니 영(瑛)이요 규(珪)는 생원(生員)이며 큰딸은 생원 이시찬(李詩讚)에게 다음은 여승감(呂承堪)에 다음은 유학(幼學) 박성형(朴成亨)에게 다음은 장사랑(將仕郞) 이장원(李長源)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며 증손과 현손 이하가 七○여 명이다.

그해 四월 임신(壬申)에 광주(廣州) 서쪽 방이동(芳荑洞) 계좌(癸坐) 정향(丁向) 언덕에 장례했다.부인(夫人)은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었는데 묘는 서쪽 언덕 一백여 보(步)되는 곳에 있다.장례를 지낸 이듬해 무신(戊申) 정월에 여러 아들들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자 하여 나 서거정(徐居正)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슬픔을 참고 명(銘)을 쓰는 바이다.내가 무신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정축년 복시(覆試)에 합격한 것이 모두 공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것이요 공이 집현전에 있을 때 내가 말석(末席)에 참여한 것이 몇 년이었다.공이 세 차례 묘당(廟堂)에 들어왔을 때 내가 세 번 참찬(參贊)이 되고 두 번 찬성(贊成)을 지내는 등 함께 一○년 동안 모시면서 공의 덕망과 풍채를 존경해 복응(服膺)했는데 지금은 산이 돌아가시어 다시는 우러러볼 수가 없으니 슬픈 일이다.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이 간직한 별의 정기를 타고 공 같은 영재가 태어나셨네.광풍제월(光風霽月)처럼 가슴속이 탁 트이고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그 모습 우뚝했네.일찍이 성세(盛世)를 만나 풍운(風雲)을 만난 호랑이와 용이었네.두루 다섯 조정을 섬긴 것 천 년에 드문 일이네.사헌부에서 이름 떨치고 문형(文衡)을 지내고 세 번 의정(議政)을,네 번 공신(功臣)이 되었네.계책 내어 임금 보좌하고 나라를 경륜(經綸)하고 바른 정사 시행하여 베풀었으니 어디에 간들 불가하랴 제때에 알맞았네.나라의 노성(老成)한 원로 됨이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 같고 시종 공명(功名)을 이룬 것은 분양(汾陽) 곽자의(郭子儀) 같았네.봉황(鳳凰)의 상서(祥瑞) 거북처럼 신통했네.사람들은 주석(柱石)으로 여기고 나라의 훌륭한 보좌여서 충정(忠貞)이란 시호 밝게 실려 있네.울창한 광릉(廣陵)에 공의 무덤이 있어 높다란 비석에 바람 소리 요란하네.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 서거정(徐居正) 지음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김수동(金壽童)은 글씨와 전자(篆字)를 씀

 

삼가 상고하건대 충정공(忠貞公)의 신도비(神道碑)는 달성(達成) 서거정(徐居正) 공이 서(序)와 명(銘)을 짓고 홍문관부교리 김수동(金壽童) 공이 글씨와 전자(篆字)를 썼으니 홍치(弘治) 무신년에 세운 것이다.그러다 연산군(燕山君) 갑자년 성종(成宗)이 폐비(廢妃)할 때의 일을 추죄(追罪)하여 당시의 대신(大臣)과 종신(從臣)을 모조리 극형(極刑)에 처했는데 공 역시 돌아가신 지 이미 十八년이 지나 화(禍)가 황천(黃泉)에 까지 이르러 묘소의 의물(儀物)이 전부 파괴되었으니 참혹한 일이다.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여 맨 먼저 유명(幽明)을 달리한 사람에게 억울함이 미친 자부터 먼저 설원(雪입)하라고 명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유독 신도비만은 다시 세우지 못해 지나는 길손과 나무하고 소치는 아이들까지도 무덤을 가리키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러다 금년 봄에 공의 외오대손(外五代孫)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공이 처음에 귀양을 갔다가 다시 기용(起用)되어 정혁(鼎革) 재상이 되었는데 공사를 보는 여가에 공의 「훈명(勳名)과 사업(事業)이 우리 동방에 빛나는데 이제 돌아가신 지 一백년이 되었는데 신도비가 없으니 그 자손 된 자들이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달성의 비문 원고(元稿)가 있으니 그걸로 다시 비석에 세워 영원히 전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이에 좌찬성 이시언(李時彦) 공,관찰사(觀察使) 심열(沈悅),병조참판(兵曹參判) 신경진(申景냅),이조참의(吏曹參議) 최명길(崔鳴吉) 군,동부승지(同副承旨) 김군(金君)│원문이 빠졌다.│이 찬동하였다.이에 나 준겸(浚謙) 함께 가르침을 받고 역사를 시작하기로 했다.동중추(同中樞) 이신의(李愼儀) 공이 일찍이 수양(首陽)을 다스린 적이 있어서 이번 일을 위해 빗돌을 캐어 강으로 운반해 오고 전(前) 군수(郡守) 이승형(李升亨) 군에게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공의 외손들이며 또 후손 경창(慶昌)이 묘소 아래에 살고 있어 그가 일을 감동했는데 이 모두 수상(首相)이 경영에 따른 것이다.공의 내외 여러 자손으로 관직에 있는 자들이 매우 많아 각자 비용을 연출했다.또 심열 공이 해자(楷字)를 잘 쓰므로 글씨를 쓰도록 맡기고 나 준겸에게 이런 사실을 이상과 같이 쓰도록 했다.화(禍)를 당한 이후 새로 쓴 봉분 역시 계좌(癸坐) 정향(丁向) 언덕이다.

외육대손(外六代孫)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지음

외육대손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경기도관찬사 병마수군절도사 개성유수 도순찰사(兼京畿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開城留守都巡察使) 심열(沈悅)이 전자(篆字)와 글씨를 아울러 씀

천계(天啓) 三년 一○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