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정절공 정갑손의 묘
?∼1451(문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중(仁仲). 중추원사 흠지(欽之)의 아들이며, 문종의 후궁 소용 정씨(昭容鄭氏)의 아버지이다.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뒤 부정자·감찰·병조좌랑·헌납·지평 등을 두루 거쳐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1435년(세종 17)에 강직한 성격을 인정받아 좌승지로 발탁되고 지형조사(知刑曹事)·예조참판을 거쳐 1438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1441년 대사헌으로 이도(吏道)를 바로잡아 더욱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뒤 경기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중추원사·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한 뒤 우참찬을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좌참찬이 되어,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였다. 그는 청렴하기로 널리 알려져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정절공묘 이곳은 조선조에서 특히 이름난 대사헌인 정절공의 묘소이다. 공의 휘는 갑손 자는 인중이며 휘흠지 문경공의 육남중 장남이며 태조 5년 병자(1396년)에 동래정씨 14세로 탄생하였다. 태종17년(1417년)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 누진하여 세종23년(1441년) 대사헌에 올라 격탁 양청하며 법도를 엄정히 집행 기강을 바로 잡으며 사사로운 청탁은 일체 용납되지 않아 독격골이란 별칭을 들으며 명성을 떨쳤다.
세종 24년(1442년)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변방 민생의 구휼을 잘하니 임금께서는 황정을 잘 다스리는데는 정갑손이 단연 으뜸이라며 칭찬했다. 공이 한양에 다녀온 사이 있었던 함길도 향시에 장남 휘 우가 합격된 방을 보고 놀라며 내아들은 학업이 아직 미진한데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느냐고 호통치면서 아들의 방을 지우고 시관은 파면시켰는데 오늘날의 공직자가 친인척 관리를 하는데 가히 수범이 될만한 일화로 최근에 문민정부가 출범할 초기에 공의 처사가 공직자의 본이 될만하다며 TV에도 방영되어 유명하다.
문종 즉위 원년(1450년) 좌참찬에 오르셨고 문종1년(1451년) 아직도 일할 수 있는 향년56세에 돌아가시니 문종은 7월10일 사제문을 내리셨으며 동궁도 7월16일 치제문을 내리셨다. 시호는 정절이며 세조7년(1456년) 좌의정에 증직되고 중종9년(1514년)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조선의 청백리 215명중 특별히 선발한 8청에 공도 뽑혔는데 맹사성 박팽년 백인걸 이언적 유관 이원익 정갑손 황희등 8분의 행장을 1980년 내무부지방행정연수원 발행 공직자를 위한 명언록이라는 책자에 사표로 올려 공무원연수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묘는 당초의 풍양에서 광능 금표로 선영따라 봉현에 이장하였다.
逸 話 정창손의 형 정갑손(鄭甲孫)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그 강직한 性品이 세종에게 알려져 좌승지로 발탁되었고, 예조참판,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고서는 조정의 기강을 확립함으로써 더욱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좌참판(佐叅贊)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는데, 性品이 강개하여 곧은 말을 서슴치 않았고 또 청렴 검소하여 집에 여축(餘蓄)이라곤 없었다.
일찌기 대사헌으로 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그는 조희때 정승 하연(河演)과 이조판서 최부(崔府)가 입시해 있는 자리에서, 『저 두사람은 사리를 알면서도 부당하게 사람을 등용했으니 마땅히 국문을 해야 한다』고 아뢰니 세종은 웃으면서 양편을 화해시켰다.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땀이 비오듯 하는 그 두사람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섭섭히 생각지 마시오』하고는 곧 녹사(錄事)를 불러서 부채를 갖다 주게 했다고 한다. 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서울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함경도 향시(鄕試)의 방을 보니 자기의 아들 우가 들어 있었다.
그는 시관을 불러 엄히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내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우가 學業이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이몸을 속이려 하느냐』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그 시관을 파직시켰다 하니 그의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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