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세 승지공 휘 정필동의 묘

 

1653(효종 4)∼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종지(宗之). 의주부윤 경업(慶業)의 증손으로, 태구(台耉)의 아들이다. 민정중(閔鼎重)의 문인이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0년 영산현감으로 재직 중 백성을 착취하고 도로가 조악(粗惡)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99년 사간원정언으로 기용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이때 허균(許筠)의 시를 간행하여 죄를 입은 박태순(朴泰淳)이 외직에 임용된 것에 대한 인사행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 뒤 금산군수를 거쳐 1705년 장령에 다시 기용되었고, 같은해 9월에는 정언으로서 종친의 정치간섭 배제, 세자의 정치참여 요청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1710년 당쟁을 일삼은 죄로 파직되었으나 1712년 장령으로 복직되었으며, 그뒤 동부승지·경주부윤을 거쳐 1717년 우승지에 이르렀다.

솔직하고 성실하였으며,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부하들을 엄숙히 단속하였다고 한다.

 

 

승지공묘

이곳은 동래정씨 병신대보를 발간하신 승지공 묘소이다. 공의 아버지 휘 태구 유촌공께서는 학덕으로 명망이 높아 장능 참봉에 천거되었고 어머니 정부인 경주김씨와의 2남중 장남인 공의 휘는 필동 字는 종지 호는 수와이며 동래정씨 23세로 효종4년(1653년) 탄생하였다.

 

노봉 민정중선생의 문하생이며 숙종원년(1675년) 사마시에 입격하고 숙종 10년 갑자(168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화랑을 거치고 각 고을 현감 부사를 역임 숙종 30년(1704년)에는 인동 부사에 도임하고 다시 장령이 되었는데 칠곡 죽전동에는 부사 정필동 청덕 선정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우리 동래정문을 빛내고 있다.

 

다음해에 경주 부윤이 되시고 동래정씨 병신대보 6권을 간행하였으며 그 보판판각은 칠곡군 지천면 오양재에 소장되어 있는데 마침 이 문화재급의 보물과 청덕 선정비가 같은 고장인 칠곡에 있으니 그 감회가 특별하며 소중히 간직보존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숙종 43년(1717년)에 우승지와 좌승지에 오르셨고 다음해 숙종 44년(1718년)에 득병하여 그해 6월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은 66세이다. 정부인 고령박씨와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숙종 43년(1717년)의 사마시에 세 아드님이 모두 입격하여 연벽의 영광이 있었고 차남 언섭은 후일에 영조때 증광시에 장원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다.

묘는 이곳 충주 이류면 두정리 파소의 의주부윤공묘 백호 하록에 내외분 합부로 뫼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