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참판공 휘 정언섭의 묘

 

1686(숙종 12)∼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리(公理). 광주부윤(廣州府尹) 필동(必東)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17세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매우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1717년(숙종 43) 사마양시를 거쳐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27년 정언이 되었는데, 그 당시 송인명(宋寅明)등이 탕평론을 주장하면서도 정론(正論)으로써 역적을 물리칠 것을 논하는 자는 비난하여 당습(黨習)이라 하니, 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봉사(封事)를 올려 이의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신치운(申致雲)·박필운(朴弼雲)등의 죄를 논책하고,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김일경(金一鏡)일파의 죄를 논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면되었으나, 이듬해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영조가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여 지평으로 복직시켰다.

1729년 동래부사, 이어 충청도관찰사·동부승지·광주부윤·도승지·한성부우윤·병조참판·삼화부윤·안변부사 등을 지냈다. 이어 호조·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174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글씨에도 능하여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전망유해총비(壬辰戰亡遺骸塚碑)를 썼다.

 

참판공묘

이곳은 동래화지산 시조 묘역의 휘 문도 호장공의 묘비를 세워서 유명하신 참판공의 묘소이다. 공의 휘는 언섭 字는 공리 호는 정지재이며 휘 필동 승지공의 아드님으로 숙종 12년(1686년) 탄생하신 동래정씨 24세이다.

숙종 43년(1717년) 사마시에 공과 3형제가 모두 입격 연벽되었고 공은 영조 원년 을사(1725년) 증광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우리 가문을 빛냈다.

 

성균관 전적으로 출사하여 사간원 정언 지평을 거치고 1729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하고 동래화지산의 시조묘역 정화작업을 하며 휘 문도 호장공의 묘비도 건립하여 오늘에 전해 보존되고 있으며, 또한 동래의 내주성도 임진왜란을 지낸 140여년만에 새롭게 수축하고 임진전망유해총비석도 건립했다. 그후 충청관찰사, 동부승지 광주부윤 도승지를 거치고 호조와 형조 및 예조의 참판에 올랐으며 영조 17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권수암 선생의 문하에서 송자학을 면학하였고 글씨와 문장도 뛰어났다. 영조 25년(1749년) 향년 63세에 돌아가셨으며 묘는 이곳 충주시 이류면 두정리 파소의 선고 승지공묘 계하에 내외분을 합부로 뫼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