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안일호장 휘 정문도 묘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217의 2번지 화지산

 

동래정씨 문중에 예천군 지보면 익장(益庄)마을에 있는 정사(鄭賜)의 묘와 더불어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고 있는 명묘(名墓)가 있다.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華池山) 기슭에 터잡고 있는 중시조 2세 호장공(戶長公) 정문도(鄭文道)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그 묘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저술된 거의 모든 음택(陰宅) 풍수 연구서에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묘다.

 

정묘터는 자연과학적인 입지 측면에서 벌써 여느 분묘와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무릇 대명당이란 출중한 내맥(來脈)과 환포(環抱)지세, 그리고 광명한 안대(案對)를 구비해야 하는 것을 필수 요건으로 하는 바, 정묘는 그들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매우 훌륭한 장소에 터잡고 있다.

 

낙동정맥의 천성산(千聖山 혹은 원적산 圓寂山)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지맥은 금정산(金井山)의 만덕고개를 지나 금정봉에 이르러 그 웅대한 양팔을 벌리는데, 거기에서 왼쪽 줄기는 화지산과 황령산(荒嶺山)을 지나 용당 동신선대에서 바다와 만나고, 오른쪽 줄기는 불태령(佛態嶺)과 구덕산(九德山)을 지나 다대포 앞바다의 몰운대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오른쪽 지맥의 허리 부분인 엄광산(嚴光山)에서 동으로 뻗어나간 지맥은 수정산(水晶山)과 부산(釜山)까지 이어져, 맞은편 황령산 자락과 더불어 수구(水口)를 일차 관쇄하고, 또 그 너머로는 영도(影島)의 봉래산(蓬萊山)이 이른바 길 격의 삼태봉(三台峰) 형상으로 솟구쳐 아름다운 조산(朝山)을 이룬다. 외판국(外版局)이 그토록 광대 무변함에도 정묘터에서는 전혀 허(虛)함이 느껴지지 않으니, '뭇 산이 모인 곳에 명당이 있고, 뭇 산이 그친 곳에 진혈(眞穴)이 있다'는 옛 풍수 금언(金言)이 정녕 빈말은 아닌 듯하다.

 

더구나 내(內)판국의 짜임새 또한 외판국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손색이 없다. 금정산과 금정봉, 그리고 화지산을 차례대로 태조산(太祖山), 중조산(中祖山 혹은 宗山), 소조산(小祖山 혹은 主山)으로 개념 설정하든, 아니면 금정산을 중조산, 금정봉을 소조산으로 삼은 후, 화지산을 부모산(혹은 주산)으로 보든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일단 내맥이 뚜렷 하기 때문에 그런 말장난은 접어두고 그 모든 관심사를 판국 자체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정묘 터는 여러 겹의 백호 지맥들이 한 줄기의 청룡 지맥을 둘러싸고 있는 특이한 지세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본신룡(本身龍: 혈처가 있는 주산의 몸체)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나간 나지막한 외백호 줄기가 안산(案山)이 되고, 그 너머로 보이는 봉래산, 부산, 수정산 등은 모두 조산이 된다.

 

그러나 정묘 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역시 분묘가 자리한 위치 이다.

주산과 안산, 그리고 청룡과 백호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높이를 십분 반영하여, 황량하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은 가장 적절 한 높이에 절묘하게 묘터를 써놓은 것을 바라보노라면 그 누구든 살아 숨쉬고 있는 풍수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것을 두고 대다수의 풍수연구가들은, 정묘와 같은 소위 야(也)자 형의 지세에서는 두 번째 획 아래 끝부분이 혈처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좌.우 지맥이 서로 감싸고 있는 지세 상황만으로도 얼마든지 그곳을 중심점으로 인식할 수 있기때문에 굳이 야자형 명당 운운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더구나 청룡, 백호지맥과 주산, 안산의 높이에 따라 두 번째 획 지맥상에도 그 혈처의 위치가 언제든지 아래, 위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인즉, 어찌하여 그 아래쪽 끝자리만 혈처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천자문이 천(天)자로 시작하고 호야(乎也)자로 끝맺는 점에 착안하여, 만약 야자형의 혈처 앞쪽에 천자형의 지세가 있고, 그 뒤쪽에 호자형의 지세가 있다면 그 터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길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풍수 공부하겠다는건지 아니면 천자문 공부하겠다는 건지 필자로서는 한심스럽다 못해 아예 기가 콱 막힐 지경이다.

 

그런 황당무계한 말들은 어찌보면 그 터를 둘도 없는 성역으로 관념화 하려고 애쓴 정씨 가문 사람들의 노력보다도 훨씬 더 값어치가 없다. 예컨대 분묘 왼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황령산의 바윗돌을 역적바위로 상정하고 그 이름을 천파암(天破巖)으로 지어 압승(壓勝)한 것이라든가, 원조산(遠朝山)인 봉래산이 이른 바 삼태성(三台星)이어서 그것은 곧 정씨 문중에서 세 명의 빼어난 인물이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마치 가문의 유훈처럼 전해내려오고 있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풍수연구가들은 그저 단순히 그 봉래산을 연꽃, 문필봉, 고깔, 깔때기 등의 형상으로 제각각 비유하고 있다). 무척 신비화돼 있는 정묘의 터 획득과정에 얽힌 얘기만 해도 그렇다.

처음 묘를 쓴 후 세 번에 걸쳐 도깨비들에 의해 분묘가 파헤쳐지자, 보릿짚으로 마치 금관(金棺)인양 꾸며 도깨비들의 눈을 속여 매장한 끝에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는 얘기는 근본적으로는 물론 '명당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풍수 금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얘기들이 청송의 진성 이씨 시조묘를 비롯한 다른 명묘들에도 전해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곧 자신들의 조상 묘터를 하나의 신비 영묘한 실체 명당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물(物)적인 토지에 영(靈)적인 세계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예전에 흔히 기내(畿內)의 명묘터는 왕릉역(域)으로, 그리고 지방의 명묘터는 왕실의 태실지로 강제수용(收用)당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관념적으로나마 묘터를 그렇게 신령스럽게 성역화시키는 것이 또한 그같은 수용을 모면케 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을 법하다.

정묘 터와 관련된 가장 큰 풍수 오해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그 묘터의 발복설이다. 대부분의 풍수가들은 조선조에 정씨 문중이 번창한 것을 모두 그 묘의 발음(發蔭)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전통적인 풍수관은 어디까지나  땅과 사람을 위시한 만물이 똑같이 음양오행론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던 시대에서나 통했던 일종의 땅 관념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상 묘터를 정할 때는 으레 풍수사가 동원되고, 그 중에서도 흥한 가문의 조상 묘터가 이른바 대명당으로 인식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불문율처럼 돼있다.

 

그리고 본말이 전도된 그런 함정에 빠져 오늘날까지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음택풍수의 현주소다. 풍수가들은 오히려 정씨 문중에서 정묘의 조산격인 봉래산의 삼태성을 가문내 세 명의 뛰어난 인물 배출과 연계시켜 놓은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땅 속에 묻힌 조상의 뼈를 통해 후손이 잘 된다고 무작정 믿는 전래의 발복설과는 또다른 차원의 풍수이다.

정묘는 결코 그같은 전통 풍수적인 선입견을 갖고 찾을 터가 아니다. 그 터의 참모습을 느끼기 위해서는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고 가는 것이 좋다. 묘터 자체의 됨됨이만 얘기하라. 그리고 거품같은 발복론은 걷어내라. 그것이 바로 정묘 터가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참풍수 교훈인 것이다.

 

2세 안일호장 휘 정문도 신위

 

2세 안일호장 휘 정문도 비석

 

2세 안일호장 휘 정문도 묘 뒷면

 

2세 안일호장 휘 정문도 측면

 

2세 안일호장 휘 정문도 시향모습

 

 

 

현경사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