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공숙공 정  괄의 영정

 

15세 공숙공 정  괄의 묘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산92-1번지

 

정괄(鄭佸)의 자(字)는 경회(慶會)라 하며 본관(本貫)은 동래(東萊)이다. 그는 중추원사(中樞院事) 흠지(欽之)의 손(孫)이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창손(昌孫)의 아들로 세종(世宗) 一七年(一四三五) 을묘(乙卯)에 태어났다. 그는 세조(世祖) 二年 병자(丙子) 생원시(生員試)에 오르고 동(同) 十一年 을유(乙酉)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세조(世祖) 조(朝)에 이미 그의 명성(名聲)이 자자했고 사림(士林)에서는 그를 장차 공보(公輔)의 인물(人物)이라 하였다.

 

성종(成宗) 조(朝)에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늠늠한 풍위(風威)를 떨쳐 백관(百官)이 숙연(肅然)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전형을 맡아보기 三年, 종래(從來) 이조판서(吏曹判書)된 자 중 제일(第一)로 삼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옮겨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그때 황해도(黃海道) 재령군(載寧郡)의 전난제를 축조(築造)했는데 백성(百姓)의 노역(勞役)은 많았으나 성과(成果)는 오르지 못하고 백성(百姓)들은 이로 인(因)하여 심(甚)한 고역(苦役)을 치루었는데 이에 왕은 그를 파견(派遣)하여 공사(工事)의 가부(可否)를 심사(審査)하게 하였다.

 

그는 돌아와 아뢰기를 불가(不可)하다 하여 이에 즉시(卽時) 공사(工事)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도민(道民)들은 그로 인(因)하여 고역(苦役)을 덜었다 한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서 서옥(庶獄)의 처결(處決)이 공평(公平)하였고 경상도(慶尙道)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본도(本道)는 넓은 지역(地域)이고 부적(簿籍)이 운적(雲積)해 있었다.

 

그는 부결(剖決)함이 유수(流水)같고 기안(起案)에 유독(留牘)함이 없었으며 일석(日夕)에는 다만 혼자 망중한(忙中閑)을 즐겼다. 후(後)에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에서 연산군(燕山君)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 후(後) 사은사(謝恩使)로서 명(明)나라에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病)으로 세상(世上)을 떠나니 향년(享年)이 六一, 뒤에 공숙(恭肅)이라 시호(詩號)가 내려졌다.

 

공숙공묘

이곳은 휘 창손 충정공의 세 아들 중 막내인 공숙공의 묘소이다. 공의 휘는 괄, 자는 경회이며 동래정씨 15세이다. 세조 11년(1465년) 대과에 등제하고 대사헌과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거쳐 좌찬성에 오르셨다. 외직에 나가 경상도와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치적을 올렸으며 연산군 1년(1495년)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선고인 충정공과 부자간 정승이 되었으니 자랑이다. 그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셨고 명나라에 계실 때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공께서 귀국길에 오르셨는데 중도에서 득병을 하고 칠가령에 당도하여서 별세하시니 아 애처롭다. 이에 향년 60이며 시호는 공숙이다.

내유외강한 성품에 특히 효심이 지극하며 기개와 절조가 남다르고 정치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그 본을 안다했으니 오늘의 공직자에게도 처신을 올바로 해야하는 귀감이 된다 할 것이다.

 

정경부인 양성이씨와 슬하에 독자로 휘 종보를 출산하였으며 묘는 경기도 김포시 대곳면 약암리 약산에 정경부인과 쌍분으로 뫼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