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감춘추관사증시공숙정공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贈諡恭肅鄭公碑銘幷序

 

홍치칠년동  선릉예척금  상즉위시삼공결상난기인문재정왈주가자첨왈무유야정모즉탁

弘治七年冬  宣陵禮陟今  上卽位時三公缺上難其人問在廷曰疇可者僉曰無踰耶鄭某卽擢

공유평안도관찰사배의정부우의정  황제흠사고명관복우전하시년하공봉  명부경사사은미

公由平安道觀察使拜議政府右議政  皇帝欽賜誥命冠服于殿下是年夏公奉  命赴京師謝恩未

환영신질시월팔일도칠가령졸우전사기고종보실종지행봉추환용모월일장우모지기우류연복

還嬰身疾十月八日到七家嶺卒于傳舍其孤宗輔實從之行奉樞還用某月日葬于某地旣又纍然服

상래곡차언왈선공림졸유언여고왈오무공덕가기사편관지귀예고산이신물립비묘도장허미위

喪來哭且言曰先公臨卒遺言與孤曰吾無功德可紀死便棺之歸瘞故山爾愼勿立碑墓道張虛美爲

오수오호인위지호고유수사지조사유갈고야여오선공이묘무표즉수위아인자호감고내독기행

吾羞嗚呼忍違之乎顧惟雖士之早死有碣古也如吾先公而墓無表則誰謂我人子乎敢告乃讀其行

장차탄지왈유차의이불이장용비궐여안공휘괄자경회동래인야한성부윤증의정부좌찬성휘부

狀且嘆之曰有此矣而不以章庸非闕歟按公諱佸字慶會東萊人也漢城府尹贈議政府左贊成諱符

지증손중추원사증의정부영의정시문경공휘흠지지손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순성명양경제좌

之曾孫中樞院使贈議政府領議政諡文景公諱欽之之孫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

리공신봉원부원군시충정공휘창손지자비승녕부소윤청풍정지지녀공생선덕을묘중경태병자

理功臣蓬原府院君諡忠貞公諱昌孫之子妣承寧府少尹淸風鄭持之女公生宣德乙卯中景泰丙子

생원첩성화을유문과기서사다천역재  세조조기자자유성명사림지이공보기  선릉초림어회

生員捷成化乙酉文科旣筮仕多踐歷在  世祖朝己藉藉有聲名士林指以公輔器  宣陵初臨御恢

요순지치군신경진가모유공위대사간청어경연강통감강목조실고금치란흥망지적  상가납지

堯舜之治羣臣競進嘉謨猷公爲大司諫請於經筵講通鑑綱目早悉古今治亂興亡之跡  上嘉納之

위대사헌름름진풍위백료숙연내언어  상왈정전용여악비고야원물언언심정문자위지국속상

爲大司憲凜凜振風威百僚肅然乃言於  上曰正殿用女樂非古也願勿焉言甚正聞者偉之國俗尙

무풍경도솔분추공백이진출지성외도중청배이조참판미기승위판서  상지공정직고유차제장

巫風傾都率奔趍公白而盡出之城外都中淸拜吏曹叅判未幾陞爲判書  上知公正直故有此除掌

전형범삼년관절불도이래판이조자물론추공위제일전판병아승의정부좌찬성시황해도축재녕

銓衡凡三年關節不到邇來判吏曹者物論推公爲第一轉判兵俄陞議政府左贊成時黃海道築載寧

군전탄제역민다이공불취민심고지  상명공왕심편부공환백이위종불가성즉파지일도지민수

郡箭灘堤役民多而功不就民甚苦之  上命公往審便否公還白以爲終不可成卽罷之一道之民受

기사정충정우치상지호애불용부도법판형조서옥평출안경상도본도지대부첩운적재타즉청단

其賜丁忠貞憂治喪止乎哀不用浮屠法判刑曹庶獄平出按慶尙道本道地大簿牒雲積在他則聽斷

일불급계이야유미료공부결여류안무류독일석단좌소이  국제관찰사본종이품직  선릉염공

日不給繼以夜猶未了公剖決如流案無留牘日夕但坐嘯爾  國制觀察使本從二品職  宣陵念公

강수특명겸지중추부사관찰사유무어시차  황조봉태자공충진하사여경사예부랑중이담견공

降授特命兼知中樞府事觀察使有無御始此  皇朝封太子公充進賀使如京師禮部郞中李曇見公

의용위서반이상왈오견조선사다의무여정재상후매견행인필문공기거복판병조겸지경연사시

儀容謂序班李相曰吾見朝鮮使多矣無如鄭宰相後每見行人必問公起居復判兵曹兼知經筵事時

평안도관찰사체  선릉특명공왈차도피폐금견경부득이이재본도미일주이입위상공지서래야

平安道觀察使遆  宣陵特命公曰此道疲弊今遣卿不得已爾在本道未一周而入爲相公之西來也

도인막불거호가액왈호위호행지초태학생이황등항론위  선릉설재불가사섭대신언파불손명

都人莫不擧乎加額曰胡爲乎行遲初太學生李穔等抗論爲  宣陵設齋不可事涉大臣言頗不遜命

찬우외정신론구불득공위상수청방환물론익중지공재중원전배좌상고기시일즉미졸육개일의

竄于外廷臣論救不得公爲相首請放還物論益重之公在中原轉拜左相考其時日則未卒六個日矣

공임절촉구개이사사내왈몽루  조수은증미보효만일사욕국궁보지어  전하금불과명야부지

公臨絶囑剾介以使事乃曰蒙累  朝殊恩曾未報効萬一思欲鞠躬報之於  殿下今不果命也訃至

조야실망이위명당실동량  상진도위지불어자삼일명예관사제부증유가태상의지왈모공군자

朝野失望以爲明堂失棟樑  上震悼爲之不御者三日命禮官賜祭賻贈有加太常議之曰某公君子

왈칭야수지육십일하기단야공성지효충정공년유팔질상강강공위기일품수륭한성서매조알지

曰稱也壽止六十一何其短也公性至孝忠貞公年踰八●尙强康公位己一品雖隆寒盛暑每朝謁之

가필취침문안왈안연후내퇴충정위영의정공판이조일일입반행충정홀부지공즉배부이출인개

暇必就寢問安曰安然後乃退忠貞爲領議政公判吏曹一日入班行忠貞忽仆地公卽背負而出人皆

목송이흠상지공신장팔척심장어신관이율대이정망기외불가릉기고규기내불가기기유출이유

目送而歆賞之公身長八尺心長於身寬而栗大而正望其外不可凌其高窺其內不可旣其有出而有

출유척명어모안민지책입즉총금여힐조옥역육조리삼태일신이백책췌소위좌우지무불의지자

黜幽陟明禦侮安民之策入則摠禁旅詰詔獄歷六曹履三台一身而百責萃所謂左右之無不宜之者

기불위공야충정공위상삼십년궐유성적기우간책공능세기미이독향년색고시택유불가언민지

其不謂公耶忠貞公爲相三十年厥有成績紀于簡策公能世其美而獨享年嗇故施澤有不暇焉民之

무록가언야공취모지여생자녀기선인의유후고불연야기서지우명지왈

無祿可言耶公娶某之女生子女幾善人宜有後顧不然耶旣叙之又銘之曰

아동무족동래정씨계계면면기적기류문경지손충정지자헌헌좌상극류극사붕박운소숙구만리

我東茂族東萊鄭氏繼繼綿綿旣積旣留文景之孫忠貞之子憲憲左相克類克似鵬搏雲霄焂九萬里

삼태수요백료앙시  만기운초방융시의조천자정위의다지관자도장왈차진사조물시여천탈백

三台垂耀百僚仰視  萬幾云初方隆恃倚朝天子庭威儀多只觀者堵墻曰此眞使造物猜歟天奪魄

의동민하고택불의피곡망명정만도인사무위공삼정영불사개장하작강하교악상즉적위우로전

矣東民何辜澤不衣被哭望銘旌滿都人士無謂公三精靈不死盖將下作江河喬嶽上則赤爲雨露電

박은연공용위세이익기여범용동부초목아명우석이시무극

雹隱然功用爲世利益豈如凡庸同腐草木我銘于石以示無極

 

공숙공(휘 괄) 비문병서

의정부의 좌의정이며 겸직으로 영경연춘추관사이신 정공의 비명과 서문이다.

 

서기 1494<성종 25(明나라 孝宗朝 弘治7年)> 겨울 성종께서 승하하시고 지금의 주상이 즉위하셨을 때 三相이 궐하였었다.

임금께서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합당한자를 물으시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되 정괄(鄭佸)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하니 바로 특별하게 公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서 의정부(議政府)의 우의정(右議政)을 배수하였다.

 

明나라의 황제(皇帝)께서 고명관복(誥命冠服)을 전하(殿下:임금)에게 내리시니 그해 여름 公께서는 임금의 명(命)을 받들고 중국의 왕경(王京)에 사은사(謝恩使)로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시고 신병이 생기어 서기 1495년 10월 8일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역사(驛舍)에서 돌아가시니 시종(侍從)하여 갔던 그의 아들 종보(宗輔)가 시신을 받들고 돌아와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약암리 약산후록(京畿道金浦郡大串面藥岩里藥山後麓)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이미 상복(喪服)을 입고 와서 곡하며 말하기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아들인 나에게 유언(遺言)을 하시기를 "나의 공덕(功德)이 기념할 바 없으니 죽은 뒤에 간단하게 관(棺)에 넣어 돌아가 선산(先山)아래에 묻을 따름이고 네가(爾) 삼가 비(碑)를 세우지 말 것이며 묘도(墓道)를 사치스럽게 허미(虛美)로 장식(裝飾)하면 오히려 나의 수치(羞恥)가 된다" 하시고 당부하셨으니 슬픈일입니다.

 

도리켜 보건대 비록 선비가 일찍 죽어도 묘갈(墓碣)이 있는 것이 오래 되었는데 나의 선공(先公) 묘(墓)에 표석(表石)이 없다고 보면 누구나 나를 일러 사람의 자식이라 이르겠습니까?』하면서 감히 못하는 말로 말하여 이제 그의 행장(行狀)을 읽어보고 그와같이 위대하신 공덕(功德)을 기록하여 세상(世上)에 알리지 않으면 실제로 그 공덕(功德)을 멸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탄식(嘆息)하더라.

 

살펴보건대 公의 이름은 괄(佸)이요 자(字)는 경회(慶會)이며 동래인(東萊人)이다.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서 증직(贈職)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시고 휘(諱) 부(符)의 증손(曾孫)이며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증직(贈職)이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시며 시호(諡號)가 문경공(文景公)이고 이름(諱)이 흠지(欽之)의 손(孫)이며 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순성명양경제좌리공신봉원부원군(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蓬原府院君)으로 시호(諡號)가 충정공(忠貞公)이며 이름(諱)이 창손(昌孫)의 아들(子)이고 어머니(母親)는 승녕부(承寧府)의 소윤(少尹) 청풍(淸風) 정지(鄭持)의 딸(女)이니라.

 

1435년<世宗 17(明宣宗 宣德 10年)>을묘(乙卯)에 출생(出生) 1456년(世祖 2年)병자(丙子)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465년<世祖 11년 明憲宗 成化 9年>을유(乙酉) 문과시(文科試)에 급제 이로부터 벼슬에 참여하시면서 많은 경력(經歷)을 밟았으니 세조조(世祖朝)때부터 이미 자주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고 사림(士林)들은 서로 지칭(指稱)하기를 公은 재상(宰相)의 그릇(器)이라 하였다.

 

성종조(成宗朝) 초기(初期)에 요순시대(堯舜時代)의 덕치(德治)를 밝히려고 하니 여러 신하(臣下)들이 다투어 현명(賢明)한 경륜(經綸)과 모책(謀策)을 헌납(獻納)할 때 公께서 대사간(大司諫)으로서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고금(古今)을 망라 치(治) 란(亂)과 흥(興) 망(亡)의 까닭과 자취를 빠짐없이 거론(擧論)하였다. 임금(王:成宗)께서 아름답게 받아드려 대사헌(大司憲)을 제수(除授)하였다.

 

늠늠(凜凜)하신 위풍(威風)에 모든 관료(官僚)들은 숙연(肅然)한 심정(心情)으로 말(言)을 조심하였다. 公께서 임금(上)에게 말씀드리기를 "정전(正殿)에서 여악(女樂)을 쓰는 것은 고도(古道)아니오니 원(願)하건대 금지(禁止)하소서" 하셨다. 말씀이 심(甚)히 바르고 엄정(嚴正)하여 듣는 사람마다 위대(偉大)하게 여겼다. 나라 풍속(風俗)이 무속(巫俗)을 숭상(崇尙)하니 온 백성(百姓)들은 선동되어 달려가 모여드니 公이 임금(主上)에게 말씀드리고 모두 내몰아 성박(城外)으로 내쫓으니 도성(都城)이 맑았다. 公께서 이조참판(吏曹叅判)이 되시고 얼마 뒤에 판서(判書)로 승차하였다.

 

임금(主上)께서는 公이 정직(正直)하고 무사(無私)하심을 알(知)기 때문에 이와같은 중책(重責)을 제수(除授)하신것이다. 관직(官職)들의 임명(任命)과 해임(解任)을 맡아 총책(總責)하는 전형(銓衡)을 장악(掌握)하시기를 무릇 3개년에 이르도록 결점(缺點)있는 사건(事件)이 보이지 않았다 국정(國政)이 문란하게 되는 까닭은 이조(吏曹)를 맡은 사람에게 물의(物議)가 많게 되는데 公의 공정(公正)하신 수행(遂行)을 제일(第一)로 추대(推戴)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옮기셨다가 갑자기 의정부(議政府)의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차(陞次)하셨다. 그때 황해도(黃海道) 땅 재령군(載寧郡)에 전탄제(箭灘堤)를 축조(築造)하는데 부역(負役)하는 백성(百姓)들은 많으나 실적(實績)은 없고 백성들 고통(苦痛)이 심(甚)하였다.

 

임금께서 公에게 명(命)하여 가서(往) 그 탄제(灘堤)의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살피게 하였다. 公께서 살펴보시고 돌아와서 임금께 끝내 성공(成功)하지 못함을 아뢰어 바로 축조공사(築造工事)를 폐지(廢止)시켜 온 도민(道民)이 혜택(惠澤)을 받게 하였다. 부친(父親)이신 충정공(忠貞公)의 상사(喪事)에는 애통(哀痛)함으로 일관(一貫)하고 기복적(祈福的)인 부도법(浮屠法:佛事)은 쓰지 않았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일을 수행(遂行)하니 모든 옥송(獄訟)이 공평(公平)하였다.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안찰(按察)하는데 본시(本是) 본도(本道)는 지방(地方)이 광대(廣大)하여 사건서류(事件書類)가 구름같이 산적(山積)하여 다른 지방(地方)에 비교하며는 종일(終日)토록 처결(處決)하여도 오히려 부족(不足)하여 밤(夜)까지 계속(繼續)하여도 다 처리(處理)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公의 처결(處決)은 물(水) 흐르듯 쉽게 하여 공안(公案)에 미결(未決)된 안건(案件)이 없었고 조석(朝夕)으로 편안(便安)하게 앉아 시(詩)를 읊으며 여유(餘裕)를 보였다.

 

당시(當時) 국가제도(國家制度)에서는 관찰사(觀察使)의 품계(品階)가 본래(本來) 종이품직(從二品職)인 판서(判書)에서 종이품계(從二品階)인 관찰사(觀察使)에 전직(轉職)함이 강등임명(降等任命)이 되는 것을 염려(念慮)하시어 다시 본직(本職)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겸직(兼職)하여 특명(特命)하였으니 관찰사(觀察使)에게 겸무(兼務)를 맡기는 예(例)가 이로부터 시작(始作)되었다.

 

명(明)나라 조정(朝廷)이 태자(太子)를 봉작(封爵)하였는데 공(公)이 진하사(進賀使)에 충원(充員)되어 명(明)나라의 서울(王京)에 갔었는데 예부랑중(禮部郞中) 이담(李曇)이 公의 위용(威容)을 보고 "서열가운데서 으뜸의 자격(資格)이다" 일컬었다. 그로부터 이랑중(李郞中)은 항상(恒常) 말하기를 "내가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을 많이 보았으나 정재상(鄭宰相)과 같은 사람은 보지를 못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후로부터는 매양 사신(使臣)을 볼 때며는 반드시 公의 안부(安否)를 물었다.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겸(兼)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제수(除授)되었다. 당시(當時)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교체(交替)하는데 성종(成宗) 임금의 특명(特命)으로 公이 평안도(平安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옮겼다. 성종(成宗) 임금께서 公에게 특별(特別)히 말씀하시기를 "차도(此道:平安道)는 피폐(疲弊)하였기로 지금 부득이 경(卿:자네)을 파견(派遣)하는 것이네" 하였다. 이곳에 있기 1년이 못되어 정승(政丞)이 되어서 돌아오시는데 입경(入京)하실 때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 어찌 대감(大監)의 행차(行次)가 더디고 늦느냐?" 하였다.

 

일찍이 태학생(太學生)인 이황(李穔) 등이 임금에게 "성종(成宗)께서 기복(祈福)하는 재제(齋祭)를 마련한 것은 불가(不可)한 일이라고" 하고 거칠게 항론(抗論)하고, 일이 대신(大臣)들에게 관계되고 논쟁(論爭)이 불손(不遜)하다고 하여 임금의 명으로 외방(外方)으로 귀향보냈는데 조정(朝廷)의 여러 신하들이 의논(議論)하여 구제(救濟)하려 하여도 불가능(不可能)하였다.

 

公께서 정승(政丞)이 되시어 앞장서 임금에게 아뢰어 귀향보낸 대학생들은 석방(釋放)하게 하니 칭찬(稱讚)하는 여론이 더욱 가중(加重)하였다.

公께서 중국(中國)에 계실 때 좌의정(左議政)으로 옮겨 임명(任命)되었는데 생각하니 돌아가시기 불과 6개일(六個日)전이다.

 

公께서 임종(臨終)하시기 직전(直前)에 부사(副使)에게 사절국사(使節國事)를 당부(當付)하시면서 말하기를 "내가 누대(累代)의 조정(朝廷)에 걸쳐 특별(特別)한 은혜(恩惠)를 입고서도 이제까지 만분의일(萬分之一)도 보은(報恩)을 못하였기로 이제 내가 몸소 전하(殿下) 앞에 진배(進拜)하여서 앙고(仰告)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이루지를 못하고 끝이니 이것 또한 운명(運命)일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부고(訃告)가 이르니까 조야(朝野)가 모두 다 같이 실망(失望)하면서 명당(明堂)의 동량(棟梁)을 잃은 것과 같이 여겼다. 임금께서는 크게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3일간 치정(治政)을 정지(停止)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제물(祭物)과 부의(賻儀)를 증가(增加)하여서 내렸다. 태상관(太常官)이 논의(論議)하기를 『정공(鄭公)은 군자(君子)라고 칭(稱)할만한 데 수명(壽命)이 61에 그치니 어찌하여 그렇게 단명(短命)일까?』하였다.

 

公은 천성(天性)이 효도(孝道)에 지극(至極)하여 충정공(忠貞公)께서 연세(年歲) 80이 넘으셨음에도 오히려 강강(强剛)하셨는데 公의 직위(職位)가 이미 1품계(一品階)이었으나 비록 혹한 폭서(酷寒 暴暑)에도 매(每) 아침마다 배알(拜謁)하고 틈(暇)을 내어 취침문안(就寢問安)을 드리고 편안(便安)하다고 말씀하신 다음에서야 물러나왔다.

 

충정공(忠貞公)께서 영의정(領議政)으로 계시고 公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하루날 같은 반열(班列)에 들었을 때 갑자기 충정공(忠貞公)께서 지상(地上)에 넘어지시니 公이 즉시로 업고 나가니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감상(感賞)하였었다.

 

公의 신장(身長)이 8척(八尺)인데 심성(心性)은 신장(身長)보다 더 길고 너그러우면서 씩씩하시고 거대하면서 바르고 밖을 바라볼 때는 그 고매(高邁)함을 능멸(凌蔑)할 수가 없었고 안을 엿볼때에는 그 있고 없음을 짐작 못하였다. 밖에 나가면 어두운 곳을 내치고 밝은 곳을 올려주며 외침(外侵)을 막아 백성(百姓)을 편안(便安)하게 하는 정책(政策)을 쓰고 안에 들면 금군(禁軍)을 통솔(統率)하며 임금의 명령(命令)을 받들고 옥사(獄事)를 규명(糾明)하였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다 거쳐 3정승(三政丞)의 한 몸 밟으니 한 몸에 백(百)가지의 책임(責任)이 모아있는지라. 옆에 적의(適宜)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言)은 바로 公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충정공(忠貞公)께서 정승(政丞)의 자리에 있기를 30년에 그 이른바 공적(功績)이 전적(典籍)에 기록(記錄)되어 公이 능(能)히 그 미덕(美德)을 후세(後世)에 계승(繼承)하더니 한가지 수명(壽命)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까닭으로 백성(百姓)들에게 혜택(惠澤)을 베풀 기간이 부족(不足)하였으니 백성(百姓)들의 복(福)이 없었다고 하며는 말이 되겠는가?

 

公은 부사(府使) 이계(李契)의 따님을 취처(娶妻)하여 一남三녀를 출생(出生)하시니 一남은 종보(宗輔)인데 봉사(奉事)를 지냈고 三녀는 장녀(長女)가 참봉(叅奉)인 이익희(李益僖)에게 차녀(次女)는 직장(直長) 심형(沈炯)에게 삼녀(三女)는 참봉(叅奉)인 윤첩(尹堞)에게 출가(出嫁)하였다. 마땅히 뒤돌아봄이 있을 터이라 그렇지 않은가? 이미 서언(叙言)을 하였으나 다시 돌에 새김하여 가로되

 

우리 동방의 성족 동래정씨는 대대로 이어 이미 쌓고 머물러서 기반이 크다. 문경(文景)의 손자(孫子)이며 충정(忠貞)의 아들(子) 위대(偉大)하시고 위대(偉大)하신 좌상(左相)께서 능히 상류(相類)하고 상사(相似)한다. 붕조(鵬鳥)가 구름(雲)과 하늘을 치고 날으니 잠깐사이 구만리(九萬里)에 이른다. 삼태성(三兌星)이 빛(光明)을 드리우니 여러 신하(百僚)가 우러러 본다.

 

일만기틀이 비롯할 때 바야흐로 크게 조정(朝廷)에서는 위엄(威嚴)스런 의표(儀表)가 뚜렷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에워싸고 모여들어 이르되 참다운 위대(偉大)한 사신(使臣)이라 조물세계(造物世界)에서 시기(猜忌)하였을까 하늘(天)에서 혼백(魂魄)을 앗아갔구나! 동쪽나라(東邦) 백성(百姓)들이 무엇 때문에 혜택(惠澤)을 입지 못하고 곡(哭)을 하며 명정(銘旌)을 바라보니 도성(都城)에 가득한 인사(人士)들이 서로 말하기를 公께서 사망(死亡)하였다고 말하지말라 그 정령(精靈)은 죽지 않았다.

 

대개 장차 천하(天下)에 지으면 강하(江河)와 교악(喬嶽)이 될 것이며 천상(天上)에 지어지면 한 우로(雨露)와 전박(電雹)이 될 것이다. 은연(隱然)한 공용(功用)이 세상(世上)을 위(爲)하여 이익(利益)할 것이니 어찌하여 보통사람이나 썩은 초목(草木)과 같으겠는가? 나는 빗돌(碑石)에 새겨 끝없는 후대(後代)에 보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