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문경공 정흠지의 묘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봉현) 산99번지

 

 

1378(우왕 4)∼1439(세종 2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요좌(堯佐). 고려 감찰대부(監察大夫) 낭생(郎生)의 손자로, 부(符)의 아들이다.

 

진사성균시에 합격한 뒤 음사(蔭仕)로 벼슬이 지평에 이르고, 1408년(태종 8)좌정승 하륜(河崙)을 탄핵하다가 먼 곳에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와 14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 병조정랑· 좌헌납을 거쳐 1416년 장령이 되었다. 이때 좌의정 박은이 정탁(鄭擢)과 노비문제로 송사를 일으키자, 박은을 탄핵하다 미움을 받아 배척당하여 4년 동안이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이 되고, 이어 집의·지형조사(知刑曹事)·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기밀(機密)을 관장하였다. 그뒤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오르고,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무사가 되어 연해의 주군(州郡)의 성터를 심정(審定)하였다.

                                

1435년(세종 17)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새로 설치한 회령 등 4진(鎭)의 수비에 공헌하고, 어머니의 병환으로 돌아와 중추원사가 되어 죽었다. 사람됨이 풍채가 좋고 밖으로는 유화하나 내심은 강직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사기 史記》·《한서 漢書》를 잘 외었다. 일찍이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진설 陣說》을 지어 올렸고, 천문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文景公(諱 欽之)의 年譜                            (李朝實錄에서 拔萃하였음)

經          歷

品  階

時          代(年代)

備              考

出              生

 

洪武 12年(1378)  6月 13日

出生地는 未詳임

進士(庚午式年試)

入  格

洪武 23年(1390)  3月   7日

十三歲에 入格하였음

司 農 寺    主 簿

從六品

太宗  1年(1401)  6月 23日

出仕하였음

司 憲 府    持 平

正五品

太宗  8年(1408) 11月  1日

河崙을 彈劾하여 長興으로 귀양

文科(丙科) 式年試

及  第

太宗 11年(1411)  4月  6日

府丞으로서 應試하였음

吏    曹    正    郞

正五品

太宗 11年(1411) 12月 20日

 

司 憲 府    掌 令

正四品

太宗 17年(1417)  5月 14日

宴飮한 大臣들을 彈核함

藝 文 館  直 提 學

從三品

世宗  4年(1422) 12月 16日

提擧로서 書雲館 推步의 일을 함

殿  試    對 讀 官

從三品

世宗  5年(1423)  3月 27日

 

司 憲 府    執 義

從三品

世宗  5年(1423)  5月 27日

 

判 司    宰 監 事

從三品

世宗  5年(1423)  8月 26日

 

同副代言(副承旨)

正三品

世宗  5年(1423)  9月 29日

 

右   副   代   言

正三品

世宗  8年(1426)  3月 25日

素膳을 그만 둘 것을 請하였음

左   副   代   言

正三品

世宗  8年(1426)  9月  4日

 

知中事(都承旨)

正三品

世宗  8年(1426) 11月 25日

 

吏   曹   叅   判

從二品

世宗 11年(1429)  9月 30日

 

使 臣    遠 接 使

從二品

世宗 12年(1430)  6月 24日

 

司 憲 府  大 司 憲

從二品

世宗 12年(1430)  6月 11日

 

刑   曹   判   書

正二品

世宗 13年(1431)  2月  1日

兀良哈의 邊境侵入 對策을 論함

咸 吉 道  巡 察 使

正二品

世宗 14年(1432)  6月  6日

鏡城 · 龍城의 施策을 進達함

刑   曹   判   書

正二品

世宗 14年(1432)  6月 11日

 

全羅道  道巡察使

正二品

世宗 14年(1432)  9月  9日

大窟水營 移遷場所를 살펴 봄

刑   曹  判   書

正二品

世宗 14年(1432) 11月 16日

野人 討伐 論議에 參與함

咸 吉 道  觀 察 使

正二品

世宗 17年(1435)  3月 27日

金宗瑞와 邊境 對策을 아룀

上      同

正二品

世宗 18年(1436)  7月 18日

咸吉道 上北邊 方略策文을 進達

上      同

正二品

世宗 18年(1436) 11月 27日

鏡城移營 不便方略을 進達함

咸 吉 道    監 司

正二品

世宗 18年(1436) 12月  6日

 

同 知 中 樞 院 使

正二品

世宗 19年(1437)  1月 16日

李滿住의 討伐論議에 參與함

母 親 (慈 堂)    卒

 

世宗 19年(1437)  7月 18日

私家인 抱川에서 鄭重히 擧行함

卒 記 (諱  鄭欽之)

 

世宗 21年(1439)  6月 16日

享年62歲 · 棺槨 · 石灰70石 下賜

王(世 宗)의  賜 祭

 

世宗 21年(1439)  6月 16日

 

贈職 議政府 領議政

正一品

世祖  7年(1456) 10月  9日

四子인 昌孫의 貴로 贈職되었음

光陵서 豐壤에 移葬

 

睿宗 元年(1469) 10月  4日

世祖陵地로 選擇, 墓地가 收用됨

 



전 중추원 사 정흠지 졸기


세종 85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6월 16일(임진) 4번째기사

전 중추원 사 정흠지 졸기

 

전 중추원 사 정흠지(鄭欽之)가 졸(卒)하였다. 흠지의 자는 요좌(堯佐)이고 본(本)은 경상도동래(東萊)인데, 고려 감찰 대부(監察大夫) 낭생(郞生)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총명하여 조금씩 자라매 글을 읽을 줄 알아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고 음관(蔭官)으로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법을 잡고 아첨하지 아니하여, 좌정승 하윤(河崙)을 탄핵하다가 드디어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태종 신묘년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병조 정랑 ·사간 원 좌헌납(左獻納)을 거쳐서, 병인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때 좌의정 박은(朴訔)이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정탁(鄭擢)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소송하다가 마침내 그 노비를 속공(屬公)하게 되니, 은이 내각(內閣)에 들어와서 일을 아뢰다가 인하여 속공함이 적당치 못함을 스스로 진술하매, 흠지가 상소하여 탄핵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심히 적당하고 간절하였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통쾌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파면당하였는데, 은의 꺼리는 바가 되어 4년 동안 쓰이지 아니하였다가, 세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으로 기용(起用)되어, 집의(執義)·지형조사(知刑曹事)·대언(代言) 등을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기밀(機密)을 맡아서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다.

 

세종이 일찍이 철원군(鐵原郡)에서 강무(講武)할 때에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좋습니다. ”하였으나, 흠지는 홀로 아뢰기를, “이제 짐승을 많이 잡은 자를 벼슬시키면 뒤에 전공(戰功)이 있는 자에게는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려고 하시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겨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충청·경상·전라 세 도의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바닷가 고을의 성터를 살펴서 정하였다. 을묘년에 국가에서 함길도에 회령 등 진(鎭)을 새로 설치하여 군무(軍務)와 민사(民事)의 일을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우므로, 세종께서 흠지를 관찰사로 삼고자 하여 의정부와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흠지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멀리 보낼 수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가 늙은 것은 한 개인의 집 사사로운 일이며 변경의 일은 중한 일이니, 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고 하여, 드디어 보내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정흠지를 관찰사로 삼고, 김종서를 도절제사로 삼았으니, 내가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어서 흠지에게 명하여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고, 이듬해에도 와서 어머니를 뵈옵게 하였으며, 특별히 술·고기·풍악 등을 내려서 어머니를 축수하게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임지로 돌려보냈었다. 이내, 어머니의 병이 급한 때문에 소환(召還)하여 중추원 사에 임명하고, 이듬해에 어머니 상(喪)을 만나고 병이 들자,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고기를 먹기를 권하고, 어의(御醫) 두 사람을 보내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진찰하게 하고, 연달아 문병하며 여러 번 내자시(內資寺)의 좋은 음식물을 내렸다.

 

죽음에 미쳐 나이가 62세인데, 임금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자를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며, 특별히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으로 하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며, 의(義)를 펴고 강하게 행함은 경(景)이다. 사람됨이 풍채가 수려(秀麗)하여 밖으로는 화(和)하고 안으로는 강(剛)하여 바라보기가 엄연(儼然)하였다.

 

평상시에 책보기를 좋아하여 한사(漢史)를 외어서 말하므로, 세종이 일찍이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흠지가 언제 사기(史記)를 이처럼 익혔는가. ”하였다. 또 가산(家産)에 힘쓰지 아니하고,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는 대체에 따르기를 힘쓰고 남다른 이론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서(遺書)로 여러 아들에게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기를 가르쳤다. 아들은 갑손(甲孫)·인손(麟孫)·흥손(興孫)·창손(昌孫)·희림(喜霖)이고, 육손(六孫)이 있다.

 

 

 

 

문경공묘

공은 휘 부 부윤공의 2남2녀중 장남으로 휘는 흠지 자는 요좌이며 고려 우왕4년 무오(1378년) 동래정씨 13세로 탄생하였다. 태종1년(1401년) 사농시 주부로 출사하고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거쳐서 세종12년(1430년) 대사헌이 되어 국가 초창기의 질서를 바로잡고 기강을 확립했는데 후일 장남 정절공과 4남 충정공이 모두 대사헌에 올라서 조선시대를 통털어도 유일한 3부자 대사헌 집안이 되었으니 우리 동래정문의 자랑이다.

 

세종13년(1431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각 고을 순무사를 거치고 세종17년(1435년) 함길도 관찰사로 체찰사인 김종서와 변방을 수비하며 4진을 설치하였다. 다음 해에 북방수비책문을 받고서 함길도 상북변방략책문과 경성 이영방략의 상언문을 올렸더니 임금께서는 이제서야 북방 근심은 안해도 되겠다면서 만족해 하였다. 그 후 세종19년(1437년) 내직으로 중추원사기 되셨으며 세종21년 기미(1439년) 6월16일에 향년 62세로 돌아가셨다.

 

증직으로 순성적덕보조공신 영의정부사 내산부원군이며 정경부인은 정경대부인에 가봉되셨고 시호는 문경이니 문경공파 종중파조이시다. 뛰어난 풍채에 외유내강하고 일에 임하여는 소신이 확실하며 경사에 통달했고 천문에 밝아 세종의 특명으로 역법을 연구하였다.

정경대부인 전주최씨와 6남2녀를 출산했고 묘는 당초 양주 풍양직등인데 공의 묘역이 광능에 금표되어 이곳 장현리 봉현에 벌이 멈춘자리에 선고와 상하로 묘좌를 택점하여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