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승지공 정  개의 묘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번지

 

 

 

통정대부좌승지동래정공휘개지단(通政大夫左承旨東萊鄭公諱价之壇)

 

우리 정성(鄭姓)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로부터 비롯하여 명망(名望)있는 공경(公卿)들이 대대(代代)로 배출(輩出)하여 도덕(道德)과 훈업(勳業)은 상고(上古)에 빛났고 자손(子孫)은 전국(全國)에 편만(徧滿)하니 참으로 우리나라의 명성(名聲)높은 집안이요 인망(人望)있는 종족(宗族)이다. 태종조(太宗朝)때 충정공(忠貞公)에 이르러서는 자질(資質)이 간중(簡重)하고 청렴(淸廉)하고 정직(正直)하여 공직(公職)에서 임금을 보좌(輔佐)하기 六十年에 세차례나 수상(首相)이 되었다.

 

공로(功勞)와 훈업(勳業)의 성대(盛大)함은 옛 현인(賢人)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어 郭汾陽(唐나라 어진 宰相인 郭子儀)과 潞國公(宋나라 어진 宰相인 文彦博)에게 비등(比等)하였다. 공(公)의 묘(墓)가 광주(廣州)의 가락동(可樂洞)에 있어 수백년(數百年)동안 수호(守護)되어 왔으며 향화(香火)가 꾾이지 아니하였는데 이세(李世)에 와서 오환(五患)의 퇴쇠(頹衰)를 면(免)키 어려우니 아! 슬프다 불행(不幸)하게 병화(兵火)의 때를 당(當)하여 창해(滄海)가 변(變)하여 상전(桑田)이 되고 구릉(邱陵)이 변(變)하여 시정(市井)이 되니 이 어찌 차마 말하랴

 

봉원군(蓬原君)의 十五代孫 연명(淵明)이 선대분묘(先代墳墓)의 인멸(堙滅)됨을 걱정하여 종회(宗會)를 개최(開催)하고 발의(發議)하여 묘(墓)를 양평군(楊平郡) 양서면(楊西面) 부용리(芙蓉里) 하개산(荷開山) 묘좌원(卯坐原)에 옮겼다.

 

충정공(忠貞公)의 장남(長男) 좌승지(左承旨)의 묘(墓)가 광주(廣州)의 술좌원(戌坐原)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된지 오래였다. 여러 해를 두고 찾아 보았으나 단서(端緖)조차 잡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추모(追慕)하는 뜻을 붙여 단(壇)을 설치(設置)하고 비(碑)를 계하(階下)에 세워 그 전말(顚末)을 대강 기술(記述)하노라.

 

十六代嗣孫 응현(應鉉) 十五代孫 철모(哲謨)는 삼가 이글을 짓고 十六代孫 복현(福鉉)은 삼가 이글을 쓰다.

 

        都有司 十六代孫 壽鉉 有司 十八代孫 元植

                  檀紀 四千三百三年(一九七○年) 庚戌 五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