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성(賜姓)과 관향(貫鄕)

 

우리 鄭氏는 西紀 32년(儒理王 9 壬辰)봄에 鄭氏로 하사(下賜 : 나라에서 내린것)받았으니 시조(始祖) 낙랑후(樂浪侯)의 玄孫 휘동충(諱東沖)(新羅使臣으로 동옥저(東沃沮)와의 수호조약체결주역(修好條約締結主役))의 年代이다. 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고 가계(家系)의 그 자체(自體)를 本位로 한 칭호(稱號)로서 동양윤리(東洋倫理)의 근원(根源)이니 신라(新羅)에는 王孫의 후예(後裔)인 박석금(朴昔金)의 三姓과 육촌장(六村長) 後裔인 李ㆍ崔ㆍ鄭ㆍ孫ㆍ裵ㆍ薛의 六姓이 처음으로 발원(發源)하였다.

 

姓氏의 유래(由來)를 살펴볼 때 姓은 천강성(天降姓)과 사성(賜姓) 토성(土姓) 속성(屬姓) 입성(入姓) 等으로 區分할 수 있으며 우리의 姓은 始祖의 세덕(世德)에 따른 賜姓으로서 의의(意義)가 깊은 것이다. 姓에 따른 관향(貫鄕)(本貫 또는 本이라고도 함)은 그 시초(始初)를 말한 것으로 누구나 삶의 故鄕인 세거지(世居地)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온 것이 통례(通例)이다.

 

姓氏만으로는 혈족(血族)을 區分하기가 어려움으로 貫鄕이 필요(必要)한 것이며 우리 鄭氏는 始祖의 종사(宗嗣)의 긍지(矜持)를 지녀왔으며 화산(花山)과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이 발상지(發祥地)이므로 貫鄕을 경주(慶州)라 하였고 始祖 지백호공(智伯虎公) 後裔로서 本貫을 달리한 영일(迎日) 동래(東萊) 온양(溫陽) 초계(草溪) 함평(咸平) 하동(河東) 나주(羅州) 봉화(奉化) 진주(晋州) 진양(晋陽)等 무려 120餘貫이고 但 서산(瑞山) 랑야(琅瑘)는 始祖를 달리하고 있다.

 

 

◈ 정씨(鄭氏)의 연원(淵源)

 

시조(始祖)의 조기(肇基)

始祖 낙랑후(樂浪侯) 지백호공(智伯虎公)은 紀元前 117年(한무제원수(漢武帝元狩) 6年甲子) 경주(慶州)의 화산(花山)에 강임(降臨)(삼국유사(三國遺事)에 육부지조개종천이강(六部之祖皆從天而降))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더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진한국(辰韓國) 사려동남(斯藘東南)의 자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長)(慶州市 一部와 慶州郡 外東邑과 舊內東面一帶)이 되었다.

 

公은 五村長과 더불어 六村을 분거(分據)하여 다스리며 부족(部族)의 연맹(聯盟)을 이룩하여 왔고 西紀前 69年(한선제지절원년임자(漢宣帝地節元年壬子))三月一日 에 五村長과 함께 알천(閼川)에서 會議를 하던 가운데 양산록(楊山麓)의 나정(蘿井)옆 임간(林間)에 서기(瑞氣)가 광천(光天)하고 백마(白馬)가 궤시(跪嘶)하는 모습을 망견(望見)한 六村長은 그곳에 가서 보니 白馬는 불현(不見)하고 자란(紫卵)(검붉은 알)속에서 한 동자(童子 )를 얻었다. 六村長은 의논(議論)끝에 그 동자(童子)를 고허촌장(古墟村長)으로 하여금 거두어 기르게 하였든바 영특(英特)함과 재성(才性)이 비범(非凡)하였고 13年뒤에는 국량(局量)이 관홍(寬弘)할뿐 아니라 그 出生이 신기(神奇)하므로 紀元前 57年 한선제오봉원년갑자(漢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에 그를 王으로 추대(推戴)하였으나 그가 곧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이며 거서우(居西于)이라 하고 國號를 서나벌(徐羅伐)이라 하였다.

 

六村長은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모든 국가정책(國家政策)을 의결(議決)하였으니 이를 화백회의(和白會議)라 하였고 이 연맹(聯盟)의 호양지의(互讓至義)는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가 되어 왕도(王道)를 토착(土着)시켰다. 그後 西紀 32年(儒理王 9年 壬辰)봄에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을 本 彼部(六村을 六部로 昇格)로 개칭(改稱)하고 公을 낙랑후(樂浪侯)로 책봉(策封)하였으며(樂浪은 곧 朝鮮의 本地니 지금의 關西地方으로 東史와 신라왕세계보(新羅王世系譜)에 記錄됨)姓을 鄭氏로 하사(下賜)하였으니 公의 玄孫 동충(東沖)의 年代이며 그뒤 나라와 운명(運命)을 같이 하였다.

 

西紀 503年(智證王 4년 癸未)10月에 군신(群臣)의 주청(奏請)으로 國號를 新羅로 개칭(改稱)하였음은 新은 덕업(德業)이 일신(日新)하고 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갖고 있으며 西紀 516年(法興王 3年 丙申)에 公은 문화(文和)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그後에 감문왕(甘文王)(西紀 656년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3年)으로 추봉(追封)되었다.

 

公은 한나라의 歷史를 창조(創造)한 원훈(元勳)으로 그 위대(偉大)한 공덕(功德)과 넓은 금도(襟度)와 겸손(謙遜)은 新羅의 국풍(國風)으로 이어 주었고 이 창업(創業)과 조기(肇基)는 후계세대(後繼世代)에 빛나는 긍지(矜持)를 갖게 하였다. 參考로 六村長의 諡號 및 추봉왕(追封王)을 다음과 같이 게재(揭載)한다.

 

順 位

六 村 名

村 長 諱

降臨地

六部改稱

諡    號

追封王號

賜    姓

閼川楊山村

謁    平

天  瑞

瓢    巖

及 梁 部

忠 憲 公

恩 烈 王

李    氏

突山古墟村

蘇伐都利

當  雲

兄    山

少 梁 部

忠 宣 公

文 烈 王

崔    氏

觜山珍支村

智 伯 虎

仁  世

花    山

本 彼 部

文 和 公

甘 文 王

鄭    氏

茂山大樹林

俱 禮 馬

景  雲

伊    山

漸 梁 部

忠 烈 王

文 義 王

孫    氏

錦山加利村

祗    沱

葺  文

明 活 山

漢 袛 部

文 讓 公

壯 烈 王

裵    氏

明活山高耶村

虎    珍

白  揚

金 剛 山

習 比 部

武 信 公

壯 武 王

薛    氏

 

 

◈ 본적지(本籍地:本貫)의 연혁(沿革)

 

동래(東萊)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인데, 신라(新羅)가 정복(征服)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고려조(高麗朝) 현종(顯宗) 때 울주(蔚州)에 소속(所屬)시켰으며, 조선조(朝鮮朝) 태조(太祖)때에는 진(鎭)을 설치(設置)하였고, 병마사(兵馬使)로 판현사(判顯事)를 겸(兼)하게 하였다.

 

세종(世宗) 때에는 절제사(節制使)로 바꾸었으며, 명종(明宗)때에는 현령(縣令)을 폐지(廢止)하고 부사(府使)를 두었다.

1914년 동래군(東萊郡)이 되었고, 1942년 동래군(東萊郡)의 주읍(主邑)인 동래읍(東萊邑) 및 남면(南面), 사하면(沙下面)과 북면(北面)의 장전리(長箭里)․반곡리(盤谷里)의 2리(二里)가 부산(釜山)에 편입(編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主要) 성씨(姓氏)는 정(鄭)․김(金)․판(判)․송(宋)․정(丁)․조씨(曺氏)등이다

 

 

◈ 동래정씨(東萊鄭氏) 파명록(派名錄)

 

교서랑공(校書郞公) 보파(輔派) : 전서공(典書公) 규파(規派)․설학재공(雪壑齋公) 구파(矩派)․문경공(文景公) 흠지파(欽之派)․참의공(參議公) 절파(節派)․평리공(評理公) 리파(釐派)․참판공(叅判公) 개보파(介保派)

첨사공(詹事公) 필파(弼派) : 호군공(護軍公) 회종파(會宗派)․윤창파(允昌派)․수찬공(修撰公) 옹파(雍派)․직제학공(直提學公) 사파(賜派)․참봉공(叅奉公) 급파(伋派)․대호군공(大護軍公) 인파(絪派) 등이다.

 

 

◈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와 변천(變遷)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상계(上系)가 살았던 곳은 짐작(斟酌)하기 어려우나, "경신보(庚申譜)”에 보면 12세(十二世) 정규(鄭規)의 자손(子孫)들은 충남(忠南) 천원(天原)의 직산(稷山)과 전북(全北) 정읍(井邑)의 태인(泰仁)을 세천지(世遷地)로 지키고 있으므로, 이 무렵부터 이 지역(地域)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던 것 같다. 20세(二十世) 이후에는 천원(天原)의 목천(木川)․경북(慶北) 성주(星州)․경남(慶南) 양산(梁山)․동래(東萊)의 기장(機張) 등지(等地)에도 일부 자손들이 터를 굳혔다고 보여진다.

 

12세(十二世) 정구(鄭矩)의 자손(子孫)들은 양주(楊州)․수원(水原) 등 경기지역(京畿地域)에서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중에서 일부는 경북(慶北) 성주(星州)로 옮겨갔으며, 일부는 청도(淸道)에, 또 다른 일부는 칠곡(漆谷)의 인동(仁同)에 세거(世居)의 터를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5세(十五世) 정예운(鄭禮耘)․정형운(鄭亨耘)의 대(代)를 전후(前後)하여 대구(大邱)․경산(慶山)․함양(咸陽)의 안의(安義)․합천(陜川)의 초계(草溪)․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여주(驪州) 등지(等地)에도 자손들이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12세(十二世) 정부(鄭符)의 자손(子孫)들은, 15세(十五世) 정우(鄭俁)의 대(代) 이래로 경북(慶北) 상주(尙州)․군위(軍威)․의흥(義興), 전라도(全羅道) 함평(咸平)․충남(忠南) 천원(天原)․천안(天安) 등지(等地)에 정착(定着)하였으며,

 

19세손(十九世孫) 정종경(鄭宗慶)․정인경(鄭麟慶)의 대(代)에 와서, 일부가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신천(信川) 등지(等地)로 옮겨가 그곳에서 세거(世居)했다고 믿어지고, 19세(十九世) 정유(鄭泑)의 후계(後系)는 충북(忠北) 충주(忠州)에서 살았던 것 같다.

 

한편 12세(十二世) 정절(鄭節)의 자손(子孫)들은 양주(楊州)․포천(抱川) 등 경기지역(京畿地域)에서 많이 살았고, 18세(十八世) 정치소(鄭致韶)의 대(代) 이후에 일부가 경남(慶南) 양산(梁山)에 가 정착(定着)하였다.

12세(十二世) 정인보(鄭仁保)의 자손(子孫)들은, 16세(十六世) 정익(鄭益)이래로 충북(忠北) 청주(淸州)에 많이 살았고,

 

13세(十三)世 정개보(鄭介保)의 자손들은 16세(十六世) 정귀로(鄭龜老)의 대(代)부터 2대(二代)에 걸쳐 경주(慶州)․경산(慶山)의 하양(河陽)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10세(十世) 정승원(鄭承源)의 자손(子孫)들은 경북(慶北) 예천(醴泉)의 용궁(龍宮) 등지(等地)에 세거(世居)하다가, 16세(十六世) 정철(鄭哲)의 후계(後系)가 함남(咸南) 함흥(咸興)으로 옮겨갔고,

 

14세(十四世) 정사주(鄭師周)의 후계(後系)는 경북(慶北) 상주(尙州)에, 16세(十六世) 정세겸(鄭世謙) 이래(以來) 전북(全北) 임실(任實) 등지(等地)에 정착하였으며,

11세(十一世) 정인(鄭絪)의 자손(子孫)들은 전북(全北) 김제(金堤)․전주(全州) 등지(等地)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9세(九世) 정태숙(鄭泰淑)의 자손(子孫)들은, 관향(貫鄕)인 동래(東萊)․기장(機張) 등지에 세거(世居)하였다.

1930년 당시(當時)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강원도(江原道) 이천군(伊川郡) 판교면(板橋面), 충북(忠北) 청원군(淸原郡) 남일면(南一面), 전북(全北) 김제군(金堤郡) 월촌면(月村面), 경북(慶北) 군위군(軍威郡) 효령면(孝令面), 청도군(淸道郡) 화양면(華陽面), 상주군(尙州郡) 청리면(靑里面), 예천군(醴泉郡) 풍양면(豊壤面), 경남(慶南) 산청군(山淸郡) 생초면(生草面), 거창군(居昌郡) 남상면(南上面)․남하면(南下面), 제주도(濟州道)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리(涯月里) 등지(等地)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진지촌 지백호 묘소
경주 백운대

 


 

 

정씨시조(鄭氏始祖) 신라(新羅) 낙랑후(樂浪侯) 묘비명(墓碑銘) 병서(幷序)

 

경주시 남쪽 삼십리 되는 곳에 아늑한 동리가 있으니 이름이 노곡공(蘆谷洞)이다.

동리 북쪽에 한개의 웅장한 산줄기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와서 앉은 호랑이 웅크린 용처럼 생겨 남쪽을 향하여 대(臺 )를 이룬 곳이 있으니 이곳이 백운대(白雲臺)이다. 백운대 위에 이십여기(二十餘基)의 큰 산소가 있는데 봉분의 높이나 묘역의 너비가 왕릉못지 않아 세대가 오래된 오늘날에도 이 지방 사람들이 "정씨 시조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아! 슬프다.

오늘날에서 신라초(新羅初)까지 二千餘年이 지나는 동안 비와 바람의 재앙이 많았고 난리의 화(禍)가 한두번이 아니어서 언덕과 산골짜기까지도 여러번 모양을 바꿀정도였다.

또 하물며 잊기 쉬운 것이 사람의 일이고 보전하가 어려운 것이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오직 이곳 백운대는 아무탈이 없이 산소가 그대로 보전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간의 꾀로만 될수 있는 일이랴? 사실은 하늘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丁卯年 봄에 모든 일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산소를 대대적으로 정화(淨化)할 것을 정하고 數十代동안 갖추지 못하였던 석물(石物)이 갖추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전날 만족치 못했던 點 을 다시 되풀이 하겠는가?

이와함께 鄭氏가 뿌리를 존중하고 시조(始祖)를 공경하는 도리에 좀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會가 끝난 뒤에 동성(東星)ㆍ성균(姓均)ㆍ기호(琪鎬)ㆍ관섭(寬燮)ㆍ경호(慶鎬)ㆍ채환(採換)ㆍ희곤(熙坤)등 宗人들의 뜻으로 부족한 나에게 "始祖 사적(事蹟)중에 가히 후세에 전할만한 글로 적으라" 부탁하니 돌아보건대 부족한 내가 사실로 감당치 못할 일이나 후손의 한 사람으로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이에 옷깃을 여미고 글로 적노라.

 

始祖의 이름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 진한(辰韓)땅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에 강림하시니 재목됨이 무리에 뛰어나고 덕(德)이 모든 사람의 으뜸이 되어 진지촌(珍支村)의 長이 되었다. 이에 알천(閼川), 돌산(突山), 무산(茂山), 명활(明活) 등등의 모든 촌장(村長)들과 더불어 같은 때에 섰고 또 지방을 접(接)하여 살으니 이분들이 바로 뒷날 新羅의 六村長이 되었다. 동경지(東京地 慶州邑誌)에 있는 "육부대인(六部大人)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는 말을 어느 사람은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는 이도 있으나 그러나 왕검(王儉)이 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降臨)하였다는 것과 삼을나(三乙那)가 땅속에서 솟아 나왔다는 것이 전에도 그러한 類의 말이 있었고 또 더군다나 大人의 태어남이 어찌 보통사람보다 특이한 點이 없겠는가?

 

한선제(漢宣帝) 지절(地節) 元年 壬子 三月에 始祖께서 다섯명의 村長과 더불어 혁거세(赫居世)를 얻어 기른지 十三年만인 甲子 四月에 赫居世를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임금을 도와 나라를 세움과 동시에 어진 신하가 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으시니 이 때문에 낙랑후(樂浪侯)로 봉하게 되었다.

유리왕(儒理王) 九年 壬辰에 임금이 六部를 고치고 姓을 하사(下賜)할때에 진지촌(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바꾸고 姓을 鄭氏로 하시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鄭씨가 있게된 시초이다.

 

或者는 "모든 鄭씨가 다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근원이 멀어지면서 派가 나뉘어 本貫을 각가 다르게 썼다. 유독 경주정씨가 끝내 옛 慶州의 本貫을 그대로 쓴 것은 경주정씨가 모든 정씨중에 長派가 되기 때문이다" 고 말한다.

또 그뒤 四百八十四年이 지난 丙申에 법흥왕(法興王)이 문화(文和)로 시호를 주었고 또 그뒤 一百三十八年이 지난 丙辰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낙랑후(樂浪侯)의 후작(侯爵)이 그가 세운 功에 내치지 못한다" 하여 봉호(封號)를 올려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대개 문화(文和)의 시호(諡號)와 甘文王의 추봉(追封)을 놓고 어느 사람은 삼국사(三國史)에 없다는 點을 들어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지만 옛날(범공(范公) 중엄(仲淹))의 맥주(麥舟)를 세상에서 이 사실이 범공(范公)의 行狀에 없다고 해서 의심하는 이는 없다.

더군다나 后孫으로서 조상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 아무리 사적(私的)인 기록이지만 이내 증거할만한 것이 있는 것을 어찌 그 기록이 私的인 것을 흠잡아 빼놓음을 범공(范公)의 맥주(麥舟)처럼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뒤 一千三百十五年이 지난 辛亥에 시풍(始風)의 덕(德)을 생각하는이 있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니 그 사당의 이름은 입덕묘(入德廟)로 옛말의 "성대한 德은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아 제사를 올린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이 대개 始祖께서 생전에 功을 세우시고 사후에 국가로부터 받은 예우(禮遇)의 대강인데 始祖의 높은 功 큰 이름에 비교할때 태산호맹(泰山毫盲:아주 작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물건을 잘보는 사람은 한개의 깃털에도 봉(鳳)의 전체를 볼수 있고 한점의 고기에서도 솥 전체의 맛을 알수 있다 하였으니 신라 고려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대(世代)가 멀어질수록 시조를 사모함은 더욱더 간절하고 사적이 오래될수록 시조를 경모함은 더욱더 돈독하여 마침내는 사람들이 新羅를 말하면 노인, 어린이의 구별없이 모든 신라는 六大人의 세운 것임을 알고 경주지방에서 백운대를 말하면 멀고 가까움의 차이 없이 모두 백운대는 낙랑후(樂浪侯)의 산소가 있는 곳임을 알 정도가 되었다.

 

실령 시조의 위대한 업적과 큰 사적이 하나 하나 모두 기록이 있고 일과 일이 유실됨이 없어 鳳의 全體 맛의 전정(全鼎)과 같이 되었더라도 始祖의 이름이 당시에 혁혁(赫赫)하고 후세에 빛남을 누가 꼭 오늘날 이것보다 낳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또 이보다도 큰 點은 始祖께서 인(仁)을 쌓고 덕(德)을 닦아 여경(餘慶:좋은 일을 한뒤에 생기는 경사)이 후손에게 미쳐 큰 벼슬을 역임하고 높은 功을 세운 人物이 앞뒤에 계속 되었고 큰 德과 깊은 학문이 있는 사람이 안과 밖에 가득하여 나무의 뿌리가 굳건함에 가지가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음에 흐름이 길은 것과 같으니 영일정씨(迎日鄭氏)의 파조(派祖) 길모(佶模)와 동래정씨(東萊鄭氏)의 파조(派祖) 교림(僑林)은 모두 始祖의 三十二世孫이 되고 온양정씨(溫陽鄭氏)이 파조(派祖) 보천(普天)은 始祖의 三十四世孫이 되며 초계정씨(草溪鄭氏)의 파조(派祖) 배결(倍傑)은 始祖의 三十六世孫이 되는 등등 나무의 성대한 일과 그늘이 八道에 가득할 정도임과 동시에 始祖에게 있어서는 모두 멀고 빛나는 후손이 되니 마치 물의 천파만파(千派萬派)가 같은 근원에서 시작되었고 나무의 남쪽가지, 북쪽가지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것과 같아 나무로 말하면 직간(直幹), 물로 말하면 원파(元派)와 같은 우리 경주 鄭氏만이 영구히 始祖의 선체(先體)를 받을 뿐 아니라 나무로 말하면 방지(傍枝) 물로 말하면 지류(支流)와 같은 모든 鄭氏들도 또한 함께 始祖의 유은(遺恩)을 받을 것이다.

 

이 점을 볼때 천지(天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백운대의 산소가 天地와 함께 안전한 것이고 日月이 항상 밝는한 始祖의 위대한 사적이 日月과 함께 빛날것임을 알수 있다. 인하여 삼가 명사(銘辭)를 지어 이르기를

" 우리나라 모든 씨족중에, 오직 鄭氏가 가장 거대하도다. 그 씨족의 뿌리는 멀고 멀어, 신라육부(新羅六部)에서 시작 되었도다. 우리 자산(觜山)에 大人이 강림(降臨)하시었도다. 문(文)과 무(武)의 재목을 모두 갖추시니, 무리의 추앙을 받으셨도다."

 

임금이 일을 홀로 이루지 못하니, 반드시 신하의 도움을 기다리도다. 참으로 훌륭한 낙랑후(樂浪侯)께서 이에 임금을 도우시도다.

그 功은 주무왕(周武王)의 십난신(十亂臣:열명의 훌륭한 신하)에 비교할 만하고, 그 혜택은 먼 百代에까지 흐르리도다. 여경(餘慶)이 뻗히는 곳에 대대로 정승 판서가 배출되도다.

이것이 어찌 新羅 千年만 그러했으랴. 고려 조선조에서도 그러하였도다. 또 어찌 고려 조선 두 나라에서만 그러하였으랴!  무궁한 뒷 세상까지 그러하리로다. 鄭氏가 비록 오래된 씨족이지만 그 命만은 오직 새롭도다.

 

저 백운대를 바라볼때, 시조의 산소가 안전하도다. 이것은 사람의 꾀로만 된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음이로다.

우리 많은 후손들이 시조의 德을 어찌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까. 이에 좋은 빗돌을 다듬어, 글을 크게 새기도다. 始祖의 큰 공(功) 성대한 사적을, 비록 다 기록치는 못했으나, 높고 높은 꽃다운 이름은 길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