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世 충정공(忠貞公) 휘(諱) 창손(昌孫) 묘소 전경

 

이곳에는 동래정씨로는 영의정에 첫 번째로 오르신 충정공과 후손들의 묘소가 있다. 공은 문경공의 6남 중 넷째이니 휘는 창손 자는 효중 호는 동산이며 동래정씨 14세로 태종2년(1402년) 탄생하였다. 대과와 중시에 등제 부제학과 춘추관등을 역임하고 자치통감 치평요람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문종1년 1451년 대사헌에 올라서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고 세종 문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공은 유교 대학자로서 조선초기 세종의 선정과 문화창달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나라안에 큰일이 있을때면 공은 노성한 경륜으로 일편단심 임금을 보필했으며 세조는 늘상 공을 숙부처럼 공경한다고 했으며 영의정제수가 2번이고 봉원부원군이시다. 성종 즉위(1469년)에 원상이 되고 연세 70세에 궤장이 내려졌다. 성종6년(1475년)에는 세 번째로 영의정에 제수되어 진신사대부의 경하를 받았다.

 

연세 84세가 되어 고령으로 퇴임하셨는데 정승자리 15년간을 청빈과 소신으로 잘 지켜냈고 부원군에 진봉되고 정경부인은 청풍군부인에 추봉되었다. 성종 18년에(1487년) 86세로 운명하셨는데 청빈 재상이 돌아가셨다며 온나라가 애도하였다. 시호는 충정이고 불천위이며 성종묘정에 배향되고 중종조에서 청백리로 녹선됐다. 공의 지극한 효성은 도덕의 으뜸이고 해박한 지식에 전아한 문장 절묘한 필법은 일세를 대표하였다.

 

묘는 당초 가락동에 뫼시고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이 신도비명을 지어 세웠는데 연산10년 갑자사화때 묘도석물이 파쇄되었다. 중종이 즉위하고 모두 신원되어 묘를 복구하였는데 신도비만은 후일에 인조1년(1623년) 오리 이원익 영상을 비롯 외손들이 뜻을 모아 서거정의 비명 원문을 옮기고 한준겸이 추찬 심열이 글씨를 써서 다시 세웠다.

 

1970년에 가락동 묘역이 도시개발되어 이곳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하개산에 공의 묘와 후손의 묘도 함께 이장하였다. 1994년에는 공의 묘도석물 일괄이 경기도 지방문화재 85호로 지정보존되고 있으며 기존의 신도비명을 신세대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워 국역신도비명을 새겨 원비 옆에 건립했으며 공이 평생에 이룩하신 역사적 훈업과 교훈을 오늘의 후진들에 사표로 남겨 시대적 정신을 올바르게 반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14世 충정공(忠貞公) 휘(諱) 창손(昌孫) 신도비

 

文化財指定案內揭示文

 

14世 충정공(忠貞公) 휘(諱) 창손(昌孫) 비석

鄭昌孫墓域石物一括

 

文化財資料 No.85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山 37-1

정창손(鄭昌孫)(1402~1487)은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효중(孝仲) 호(號)는 동산(東山) 본관(本貫)은 동래(東萊)이며, 증(贈) 중추원사(中樞院事) 흠지(欽之)의 아들이다.

 

세종(世宗)5년(142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였고, 1447년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서 최만리(崔萬里) 등(等)과 한글창제(創制)에 반대(反對)하다가 파직투옥(罷職投獄) 되기도하였다. 세종(世宗)29년(144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등제(登第)한 후 1449년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으로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 수사관(修史官)을 겸직(兼職)하면서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

 

단종(端宗)1년(1453) 이조판서(吏曹判書) 세조(世祖)1년(1455) 좌찬성(左贊成)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兼)하였으며 좌익공신(左翼功臣)3등에 녹훈(錄勳)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封)하였다. 이듬해 사위 김질(金礩)에게 들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의 단종복위음모(端宗復位陰謀)를 고변(告變)한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2등에 승차(陞次)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으며, 이어 대사성(大司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1457년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468년 예종즉위(睿宗卽位) 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려 익대공신(翼戴功臣)3등이 되고,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하자 원상(院相)이 되었으며, 1472년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성종(成宗)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2등이 되고, 성종(成宗)6년(1475)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후 성종(成宗)16년(1485) 치사(致仕)하기까지 3대조에서 15년간 영상(領相)을 역임(歷任)하였다.

 

성종(成宗)18년(1487) 86세로 별세(別世)하니 왕(王)은 청빈재상(淸貧宰相)이라하며 3일간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를 후사(厚謝)하였다. 그 후 연산군(燕山君)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폐비론(廢妃論)에 참여(參與)한 죄(罪)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나, 중종(中宗)1년(1506) 신원(伸寃)되고 중종(中宗)9년(1514)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성종(成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신도비(神道비(碑))는 원래 서거정(徐居正)이 1488년에 지었으나, 파쇄(破碎) 후(后) 개장(改葬)때 외손(外孫) 이원익(李元翼)이 인조(仁祖)1년(1623)에 재건(再建)하였다. 비문(碑文)은 한준겸(韓浚謙)이 추찬(追撰)하고 심열(沈悅)이 글을 썼다.

비(碑)의 규모는 높이 187.5cm 폭73cm 두께 24.5cm이다.

 

 

 

충정공 구비(부용리)

 

 

 

정창손(鄭昌孫) 묘소(墓所)와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안내(案內)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5호 (1994)

-소 재 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 37-1

정창손(鄭昌孫)(1402~1487)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효중(孝仲) 호(號)는 동산(東山)이며 동래정씨(東萊鄭氏) 13세(世)인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신 시(諡) 문경공(文景公) 휘(諱) 흠지(欽之)의 넷째 아드님으로써 세종(世宗)8년(14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세종(世宗)29년(144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등제(登第)한 후 조선조(朝鮮朝)의 오대조(五代朝)에서 다섯분의 임금님을 섬기시며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시고 세 번의 영상(領相)에 올라 삼위수상(三爲首相)하고 좌익(左翼),  익대(翊戴), 좌리(佐理) 공신(功臣) 등(等) 삼훈공신(三勳功臣)에 책훈(策勳)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승봉(陞封)되시다.

 

성종(成宗)1年(1469)에는 어린임금님을 보좌(補佐) 원상(院相)에 오르시고 경연(經筵)을 강(講)하셨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록선(祿選)되고 현재(現在)는 성종묘정(成宗廟庭) 공신당(功臣堂)에 배향(配享)되시니 동래정씨(東萊鄭氏) 열일곱분의 정승(政丞) 중(中)에서 첫 번째 영상(領相)을 역임(歷任)하신 역사(歷史)속의 큰 어른이시다.

 

성종(成宗)18년(1487) 86세로 별세(別世)하니 증시(贈諡) 충정(忠貞)이시다. 왕(王)은 청빈재상(淸貧宰相)을 잃었다며 3일(日)간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를 후사(厚謝)하셨으며 왕조(王朝)에서 사패지(賜牌地)로 명시(明示)한 초장지(初葬地)인 지금의 송파구(松坡區) 방이동(芳荑洞)에 안장(安葬)되었다가 강남권(江南圈)의 개발사업(開發事業)으로 公의 묘(墓)를 지난 1970年 이곳 하개산(荷開山)에 천묘(遷墓)하였으며 2005年 대대적인 성역화사업(聖域化事業)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정화(淨化)되었다.

 

이곳은 정창손(鄭昌孫)과 그 부인(夫人)인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 정씨(鄭氏)의 묘소(墓所)와 불천위(不遷位)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이 건립(建立)되고 경기도(京畿道)가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한 신도비(神道碑)와 석물일괄(石物一括)이 보존(保存)되어 있는 문화재(文化財) 보호지역(保護地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