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忠貞公) 휘(諱) 창손(昌孫)

 

1402(태종 2)∼1487(성종 1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효중(孝仲)으로 중추원사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며, 좌참찬 정갑손(鄭甲孫)의 아우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5년(1423) 사마시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집현전의 저작랑(著作郞)과 교리를 역임하면서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되었다.

 

1443년 집현전 응교가 되어 이듬해 최만리(崔萬理) · 신석조(辛碩祖)와 함께 한글의 제정을 반대,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뒤에 충신 · 효자 · 열녀의 무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지 언문으로 번역한다고 하여 모두 본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 같은 해 풀려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에서 흥천사(興天寺)를 개축하고 또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음을 들면서 왕실의 불교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 예문관(直藝文館)에 등용되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과 수사관을 겸직하면서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문종 1년(1451)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제학 · 대제학 · 병조 판서 등을 지내면서 《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단종 1년(1453)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외척 홍원용(洪元用)과의 상피관계(相避關係)로 사헌부에서 피혐(避嫌)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왕명으로 피혐(避嫌)되지 않았다.

 

세조 1년(1455) 우찬성으로 세자 좌빈객과 판이조사를 겸하였으며,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에 사위 김질에게서 들은 사육신(死六臣)과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등의 단종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2등이 되고 보국숭록대부가 더하여졌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이어 대사성 · 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처사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등으로부터는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어 1457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을 하고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데, 세조가 기복(起復)시켜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에 여러번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1462년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말하였다가 삭직되고 여산에 부처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 · 강순(姜純)의 옥사를 잘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랐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품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성종 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되었으며,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이 하사되었다.

 

1456년에 죽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를 같은 해 덕종(德宗)으로 추존하는데 적극 앞장 섰다. 한편 남효온(南孝溫)이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를 반대하였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로 인하여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책봉할 때에 진책정사(進冊正使)가 되었다.

 

1483년 세자사(世子師)를 겸하면서 여러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84세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 재상이라 하였다. 그 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사건의 논의에 참여한 죄로 부관참시되었다. 그러나 중종 1년(1506)에 신원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석물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改葬)하였다.

 

박학 강기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에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相臣史 尹甲植 編著』拔萃

 

정창손(鄭昌孫 : 一四○二~一四八七)

정창손의 자(字)는 효중(孝中)이라 하며 본관(本貫)은 동래(東萊)이다. 그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양생(良生)의 증손(曾孫)이요 중추원사(中樞院事) 흠지(欽之)의 아들로서 태종(太宗) 二年(一四○二)임오(壬午)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讀書)를 좋아하였고 세종(世宗) 五년 계묘(癸卯)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동(同) 八年 병오(丙午)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子)가 되었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누천(累遷)하고 강개직언(慷慨直言)을 잘하여 최만리(崔萬里․신석조(辛碩祖) 등(等)과 함께 한글 창제(創製)를 반대(反對)하다가 파직(罷職)되어 투옥(投獄)된 일이 있고 풀려나와 복직(復職)되어서는 또 왕실(王室)의 불교숭상(佛敎崇尙)을 반대(反對)했다가 다시 파직(罷職)된 일도 있었다.

 

그 후(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에서 부제학(副提學)으로 올라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치평요람(治平要覽)』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고 누천(累遷)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조강(朝綱)을 크게 떨쳤다. 문종(文宗) 二年 임신(壬申)에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에서 『세조정난(世祖靖難)』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자 우찬성(右贊成)․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봉원군(蓬原君)에 봉(封)해 졌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모란(謀亂)을 상변(上變)하여 또 공신(功臣)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우의정(右議政)에서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세조(世祖) 七年 신사(辛巳)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사건(事件)으로 여산군(礪山郡)으로 유배(流配) 당(當)하였다가 곧 방면(放免)되었다.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고 남이장군(南怡將軍) 등이 복주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二等,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하자 원상(院相)으로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나이 七○으로 물러나려 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이 내려졌다.

 

성종(成宗) 六年 을미(乙未)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동(同) 一六年 을사(乙巳)에 노(老)로써 물러나 정미(丁未)(一四八七)에 향년(享年) 八六으로 세상(世上)을 떠나니 청빈(淸貧)한 정승(政丞)으로서 부물(賻物)을 하고 뒤에 충정(忠貞)이라 시호(諡號)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