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氏族)의
연원(淵源)
시조(始祖)는
정회문(鄭繪文)인데,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을미보(乙未譜) 세록(世祿)을 보면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그 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알려졌는데, 그 묘지(墓誌)에는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부터 3세(三世)만 적혀
있다.
따라서
경신보(庚申譜)에서는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을
1세조(一世祖)로 하고, 정회문(鄭繪文)은 권수(卷首)에
따로 기록(記錄)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문안공(文安公)의
묘지(墓誌)가 발견(發見)되기 전까지는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기세(起世)해 왔으나, 묘지(墓誌) 내용(內容)에
따라 계대(系代)가 확실(確實)한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시조(始祖)는 정회문(鄭繪文)으로
하되, 정회문(鄭繪文)과 정지원(鄭之遠) 사이의 소목(昭穆)
분명(分明)치 않아 책(冊)머리에 실린 것이다.
따라서
기세조(起世祖)는 정지원(鄭之遠)인데, 그는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분이고,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고, 손자(孫子) 정목(鄭穆)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태부경(太府卿) 등 자손(子孫)들이 현달(顯達)하게
되어 그의 세거지(世居地)인 동래(東萊)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본래(本來)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新羅) 6부촌(六部村)의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의 후손(後孫)이다.
경신보(庚申譜)
총록(總錄)에는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3년에 지백호(智伯虎)가
정씨(鄭氏)로 사성(賜姓)을 받아 경주(慶州)에서 살게
되니 본관(本貫)이 경주(慶州)였는데, 그 뒤 동래(東萊)로
분적(分籍)되었다고 한다.
시조(始祖) 휘(諱) 회문(繪文) 제단전경
1世 휘(諱) 지원(之遠) 제단전경
◈씨족사(氏族史)의
개요(槪要)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고려(高麗) 때 보윤호장(甫尹戶長)이었던 정지원(鄭之遠)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인데, "을미보(乙未譜)"에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병신보(丙申譜)"
이후(以後)부터는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발견(發見)된 이후(以後), 그로부터 묘지(墓誌)에 의해
3세(三世)를 소급(遡及)하게 되었으므로, 정지원(鄭之遠)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다.
정지원(鄭之遠)과
정회문(鄭繪文) 사이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는 실정(實情)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는
3세조(三世祖) 정목(鄭穆)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그의 네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오름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始作)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미 대족(大族)으로 성장(成長)할 수 있었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조선조(朝鮮朝) 전 기간(全期間)에 걸쳐서 17명(十七名)의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였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二十二名)․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十九名)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것이다.
그
외에 대제학(大提學) 2명(二名)․호당(湖堂) 6명(六名)․공신(功臣)
4명(四名)․판서(判書)가 20여명(二十餘名)이 나왔고,
198명(一百九十八名)의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다.
왕족(王族)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대명사(代名詞)인
안동김씨(安東金氏) 다음으로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면서도
외척(外戚)으로 세력(勢力)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직(特徵的)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분파(分派)는 "을미보(乙未譜)" 편찬(編纂)
때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첨사공파(詹事公派)․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의
세 개파(三個派)로 나누었다.
그런데
"병신보(丙申譜)" 를 편찬(編纂)할 때에는
6세조(六世祖)인 정보(鄭輔)의 후손(後孫)들을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정필(鄭弼)의
후손(後孫)들을 첨사공파(詹事公派), 두 개파(二個派)로
나누었고, 이로부터 204년(二百四年) 이후(以後)에
편찬(編纂)된 "경신보(庚申譜)" 편찬(編纂)때에도
분파(分派)는 역시(亦是) 여기에 의거(依據)하였다.
그런데
이 2개파(二個派)는 3세조(三世祖) 정목(鄭穆)의 후손(後孫)에서
정택(鄭澤)의 후손만으로 이루어 졌고, 정항(鄭沆)의
후손과 정문도(鄭文道)의 둘째 아들로 동래(東萊)에
남아 호장직(戶長職)을 계속(繼續)한 정선조(鄭先祚)의
후손을 빠져있다.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설학재공파(雪壑齋公派), 문경공파(文景公派),
참의공파(叅議公派), 평리공파(評理公派), 참판공파(叅判公派)로
나누어 지고,
첨사공파(詹事公派)는
윤창파(允昌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참봉공파(叅奉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나누어졌다.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과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를 거쳐, 3세조(三世祖)인 정목(鄭穆)이
과거(科擧)를 통해 고려(高麗) 중앙정부(中央政府)로
진출(進出)하게 된 이후 계속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정계(中央政界)로
나아갔다.
그러나
정지원(鄭之遠)이전에도 정씨(鄭氏)는 동래(東萊)의
토착세력(土着勢力)으로 향직(鄕職)에 종사(從事)해
왔고, 정선조(鄭先祚)의 후손들은 계속 동래(東萊)에
남아 향리직(鄕吏職)에 종사(從事)했다.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은 정목(鄭穆)의
아들로 모두 문과(文科)에 올라 각각(各各) 시랑(侍郞)․
형부랑중(刑部郞中)․ 문하급사중(門下給事中)․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
예부상서한림학사(禮部尙書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이중에서
정항(鄭沆)은 청백(淸白)함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高麗史)"에
입전(入傳)된 인물(人物)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초상(初喪)을 치를 한 섬의 곡식(穀食)조차 없었는데,
왕(王)이 그의 청빈(淸貧)함에 놀라 "30년 동안
근시(近侍)의 직(職)에 있었고, 11년 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
고 하며 부미(賻米)로 쌀 100섬(一百섬)과 배 200필(二百畢)을
하사(下賜)하고, 친필(親筆)로 시호(諡號)를 문안(文安)이라
내렸다.
그의
아들 정서(鄭叙)는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
을 남긴 인물(人物)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과 동서간(同壻間)으로
내시랑중(內侍郞中) 벼슬까지 지냈으나 의종(毅宗)이
즉위(卽位)한 뒤 모함(謀陷)으로 인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길에 오르는데, 그때 왕(王)이 곧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約束)했으나, 오래도록 부름이 없자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후대(後代)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號)를 붙여서 "정과정곡(鄭瓜亭曲)"
이라 불렀다.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산접동새난 이슷하요이다/아니시며
거츠르신달 아으 잔월 효성이 아르시리이다/넋시라도
님을 한데 녀져라/아으/벼기시더니/뉘러시니잇가/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무흰 말이신져 슬읍뿐뎌/아으/님이
나를 하마 잊어시니이까/아소 님아 도람도르샤 계오
쇼셔」
교서랑공(校書郞公)의
5세손(五世孫)인 정양생(鄭良生)은 단성보리 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의 아들 정구(鄭矩)는 우왕(禑王) 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조선 개국(朝鮮開國)후 고관(高官)에
올랐다.
조선개국(朝鮮開國)후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이 되었고, 1394년 왕명(王命)으로
한리(韓理)․조서(曺庶) 등과 함께 "법화경(法華經)"
4부(四部)를 금니(金泥)로 썼다. 정종(定宗)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
태종(太宗) 때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를 거쳐 참지
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공조판서(工曹判書)․호조판서(戶曹判書)․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개성유후(開城留後)
등을 역임(歷任)하고,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 태조(太祖) 때 만든
각궁(角弓)을 수입(輸入)해 왔다.
후에
의정부(議政府) 찬성(贊成)이 되었으나 병(病)으로
사퇴(仕退)하였고, 글씨를 잘 썼는데,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
의 제액(題額)을 쓴 것이 남아 있다.
정양생(定良生)의
셋째 아들인 정부(鄭符)의 집안은, 그의 아들 정흠지(鄭欽之)와
손자 정갑손(鄭甲孫)과 정창손(鄭昌孫)에 의해 크게
이름을 날렸다.
정흠지(鄭欽之)는
음보(蔭補)로 지평(持平)이 된 후 태종(太宗) 11년(癸巳)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좌헌납(左獻納)을
거쳐 집의(執義)․지신사(知申事)․이조참판(吏曹叅判)
등을 역임하고, 1430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陞進).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433년
황보인(皇甫仁) 등과 "계축진설(癸丑陳設)"
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충청(忠淸)․전라(全羅)․경상삼도도순무사(慶尙三道都巡撫使)가
되어 주군(州郡)의 성(城)터를 심정(審定)했고, 경사(經史)와
천문(天文)에 밝았고, 염근리(廉謹吏)에 녹선(錄選)되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다.
세종(世宗)때
벼슬길에 오른 정갑손(正甲孫)은 청렴결백(淸廉潔白)함과
대쪽같은 성품(性稟) 서슴치 않는 직언(直言)으로 이름이
있었다. 함경도(咸鏡道) 관찰사(觀察使) 시절(時節)
아들 정우(鄭俁)가 향시(鄕試)에 입격(入格)한 것을
보고 시험관(試驗官)을 불러 "내 아들이 학문(學問)에
정(精)하지 못함을 아는데 아첨(阿諂)을 하려고 임금을
속이느냐." 고 대노(大怒)하며 시험관을 퇴직(退職)시켰다는
일화(逸話)가 전(傳)하고 있으며, 벼슬은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諡號)는 정정(貞節)이다.
그의
동생(同生) 정창손(鄭昌孫)은 세조(世祖)의 집권(執權)에
참여(參與)한 공(功)으로 세조(世祖)~성종(成宗) 대(代)에
벼슬이 크게 올라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다. 세종(世宗)
8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집현전(集賢殿)
저작랑(著作郞)․교리(校理)등을 역임(歷任)하고, 1444년
집현전(集賢殿) 응교(應敎)로 최만리(崔萬理)등과 함께
한글 제정(制定)에 반대했다가 투옥(投獄)되고, 1446년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불교숭상(佛敎崇尙)을 반대했다가
파직(罷職)되었다.
1449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수사관(修史官)을
겸직(兼職).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
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歷任)하고, 단종(端宗) 원년(元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자 우찬성(右贊成)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이 되어 봉원군(蓬原君)에 봉(封)해졌다.
이듬해
단종 복위(端宗復位) 음모(陰謀)를 고변(告變)한 공(功)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457년에 좌의정(左議政),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 후 익대공신(翊戴功臣) 3等에 오르고, 1469년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하자 원상(院相)이 되고,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2等이 되었으며, 70세(歲)에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며, 성종묘정(成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정창손(鄭昌孫)의
아들 정괄(鄭佸)은 좌의정(左議政)까지 올랐는데, 강직(剛直)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다가
칠가령(七家嶺)에서 병사(病死)하였고, 시호(諡號)는
공숙(恭肅)이다.
2世 휘(諱) 문도(文道) 묘소전경
2世 휘(諱) 문도(文道)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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