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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형식
작성일 2009-12-28 (월)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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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래정씨 상신 17인
조선시대 동래정씨 상신 17인
 
조선조  동래정씨 상신 17인 상신(相臣)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최고관직(最高官職)으로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의 3인으로써 의정부(議政府)를 조직(組織)하니 이를 3상(三相) 3공(三公) 또는 3정승(三政丞) 이라하여 국가(國家)의 최고기관(最高機關)이고 그 임무(任務)는 백관(百官)을 통솔(統率)하고 국정(國政)을 총괄(總括)하였다.
 

정 창 손(鄭昌孫)

1402(태종 2)~1487(성종 18) 14世. 조선(朝鮮) 전기(前記)의 문신(文臣).자(字)는 효중(孝中) 호(號)는 동산(東山), 중추원사 흠지(中樞院使 欽之)의 아들.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이어 집현전의 저작랑과 교리를 역임하면서《통감훈의 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하였다. 1443년 집현전응교가 되었는데 재직 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 《삼강행실》을 반포한 뒤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지 언문으로 번역한다고 하여 모두 본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 같은 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에서 흥천사(興天寺)를 다시 고쳐 짓고 또 경찬회(慶讚會)를 설치하였음을 들면서, 불교는 괴탄(怪誕:괴상하고 헛된 소리)하고 환망(幻妄)하여 나라를 미혹(迷惑)시키고 조정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 왕실의 불교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왕실의 불교숭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과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면서《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 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 1)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제학•대제학•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외척 홍원용(洪元用)과의 상피관계(相避關係)로 사헌부에서 피혐(避嫌)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왕의 명으로 피혐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 우찬성으로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과 판이조사를 겸하였으며,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에 사위 김질(金質)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하였는데, 일이 여의치 않자 질(質)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폭로함에 이를 세조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서 1자급을 올려 2등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하여졌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어 대사성• 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처사로 절의를 숭상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등으로부터는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어 1457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미두(米豆)50석, 종이 100권과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세조는 기복(起復: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시켜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이에 여러 번 소(疏)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으나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62년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말하였다가 삭직되고 여산(礪山)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잘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랐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이 되어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궤杖)이 하사(下賜)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이해에 덕종(德宗)으로 추존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한편,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여 세조 즉위 초에 폐위(廢位)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하였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로 인하여 지탄(指彈)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왕비의 비행으로 왕이 왕비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그 뒤 윤비(尹妃)는 빈(嬪)으로 강등되어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다가 1479년에 폐위되고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이듬해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비로 책봉할 때에 진책정사(進冊正使)가 되었다. 1483년 세자사(世子師)를 겸하면서, 세자서연(世子書筵)에 매일 빈객 1인, 낭청 2인, 대간 각 1인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이후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淸貧) 재상(宰相)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의 논의(論議)에 참여한 죄로 윤필상(尹弼尙)•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등과 함께 십이간(十二奸)으로 몰려 부관참시(剖官斬屍)되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靑白吏)에 녹선(錄選)되어 부관참시 때 철거한 석물(石物)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改葬)하였다. 박학(博學) 강기(綱紀)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정 괄(鄭 괄)

1435(세종 17)∼1495(연산군 1). 15世. 조선(朝鮮) 전기(前記)의 문신(文臣). 자(字)는 경회(慶會). 영의정 창손(昌孫)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생원시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관도에 나가 주부와 공조좌랑• 정랑을 지냈다. 146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사예를 거쳐 장령으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3년(성종 4)에는 대사간에 올라 언로의 확충,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폐단 시정, 과거급제 정원의 증가, 관리 서용의 새 기준 마련 등 국정 전반에 걸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병조의 참지 •참의를 역임하고 황해도관찰사로 승진, 잠시 외직(外職)에 있다가 다시 돌아와 한성부 좌윤•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이 된 지 수개월 만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3년간 전형(銓衡)을 담당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우찬성• 도총관• 형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49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49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冊封)을 축하하고 돌아와 다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평안도는 중국사신의 경유지(經由地)이므로 명망자(名望者)가 파견되어야 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우의정으로 승보되었으며,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칠가령(七家嶺)에서 졸(卒)하였다. 그는 맡은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기상(氣像)이 엄준하여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공숙(恭肅)이다.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 8)∼1538(중종 33). 15世 조선(朝鮮) 전기(前記)의 문신(文臣). 자(字)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吏曹判書)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뒤 성균관 학유• 의정부 사록• 봉상시 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 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중종의 총애(寵愛)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引用), 극간(極諫)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으로부터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며, 신용개(申用漑)로부터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 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宰相)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流配)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함으로써 김안로의 원한(怨恨)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著書)로는《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회덕서원, 용궁(현 : 예천)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鄕祠)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익(文翼)이다.



정대년(鄭大年)

1503(연산군 9)∼1578(선조 11). 17世. 조선(朝鮮) 전기(前記)의 문신(文臣). 자(字)는 경로(景老), 호는 사암(思菴). 전(筌)의 아들이다. 1531년(중종 26)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3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관직이 예빈시주부를 거쳐 지평• 장령• 부교리• 집의• 직제학에 이르렀다. 1542년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 부제학이 되고, 우승지 등을 거쳐 명종 때 황해도관찰사• 형조참의• 병조참의• 경기도관찰사•호조참판• 한성부우윤•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때 형조참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호조판서를 지내고, 1578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청백리(淸白吏)로서,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첩으로 정부인(正夫人)을 삼은 데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라는 왕명을 받들고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이를 알고 뇌물로 이를 무마하려 하자 완강히 거절하여 사람들이 후사(後事)를 두려워한 일도 있었다. 선조(宣祖) 초에 육조(六曹)의 장을 추천하라는 왕명이 있자 모두가 서슴없이 그를 추천할 만큼 명망이 있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17世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길원(吉元), 호(號)는 임당(林塘). 영의정 광필(光弼)의 손자로, 강화부사 복겸(福謙)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창연(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정언에 올랐다. 그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교리•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고,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이황을 추천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뒤 우찬성•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궤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 韓琦碑〉가 있고, 저서로는 <<임당유고》가 있다.


정지연(鄭芝衍)

1527(중종 22)∼1583(선조 16). 18世.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연지(衍之), 호(號)는 남봉(南峰). 영의정 광필(光弼)의 증손으로, 봉상시정 유인(惟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중호(李仲虎)로부터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는 가장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이황(李滉)•서경덕(徐敬德)•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 출입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66년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推薦)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569년(선조 6)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나이 43세에 이르러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 지평• 부교리• 헌납• 집의• 직제학 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 뒤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니, 관직에 나온 지 15년 만에 정승(政丞)자리에 오른 예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583년 신병(身病)이 깊어짐에 따라 거듭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그 역시 병중(病中)에서도 글로써 국사(國事)를 논의하다가 그 해 57세로 졸(卒)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왕이 대신할 인물을 천거(薦擧)하라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李珥)를 인재로 천거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長短點)을 잘라 말한 다음, 그의 기질을 적절히 알아서 쓴다면 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 하였다.


정언신(鄭彦信)

1527(중종 22)∼1591(선조 24). 18世.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입부(立夫), 호(號)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전라도도사• 장령• 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名將)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大諫)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彈劾)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右議政)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減刑)되어 갑산에 유배(流配), 그 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復官)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창연(鄭昌衍)

1552(명종 7)∼1636(인조 14). 18世.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경진(景眞), 호(號)는 수죽(水竹). 좌의정 유길(惟吉)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官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궤杖)을 받았다. 이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禮)로써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政房)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합계(合啓)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때마침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柳氏)는 그의 생질녀로, 옥사(獄事)가 일어날 때에는 혹 광해군이 그에게 묻기도 하여 옥사에 억울하게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주었다.



정태화(鄭太和)

1602(선조 35)∼1673(현종 14). 20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유춘(유春), 호(號)는 양파(陽坡),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광성(廣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좌의정 치화(致和)와 예조참판 만화(萬和)의 형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 교리• 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사 서• 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 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의 좌랑, 이조의 좌랑• 정랑, 의정부의 사인, 예빈시(禮賓寺)• 제용감(濟用監)• 장악원의 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면서 1631년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1필을 수상하는 문재(文才)를 보였고, 또 사간(司諫)으로 있던 1636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의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抗戰)하는 무용(武勇)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37년 말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는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 문제로 조정 정신(廷臣)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고 있었고,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姜氏) 가 사사(賜死)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어서 중진관료로서의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조•형조•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던 까닭으로 전하고 있다. 심지어는 뒷날에 사신(史臣)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할 정도였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고, 그 뒤 곧 좌의정(左議政)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鄕里)에 머무르다가, 1651년(효종 2)에 상복(喪服)을 벗으면서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673년(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輔弼)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禮訟)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黨色)을 기피하였고, 또한 치화• 만화• 지화(知和)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 요직(要職)에 많이 올라 있었으므로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일은 적극 담당하려 하지 않고 처신만을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는 비평을 듣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의 예송(禮訟)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交遊)하였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나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責務)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1662년에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연경(燕京)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73년 다섯 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凜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으며, 그 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는 시문(詩文)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 2권 2책과, 1656년(효종 7)까지의 일기(日記)인 《양파연기》 2권 2책이 있고, 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諡號)는 익헌(翼憲)이다
(뒤에 忠翼으로 바꿈.).


정치화(鄭致和)

1609(광해군 1)∼1677(숙종 3). 20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광성(廣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영의정 태화(太和)의 동생이며, 좌의정 지화(知和)의 4촌이 된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여, 형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하였는데,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관계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문한(文翰)의 관직(官職)을 거치다가, 1635년부터 1642년까지 동래부사가 되어 당상관(堂上官)에 오르기까지 주로 3사의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638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이듬해에는 함경도 암행어사로, 1641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고,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때 세자가 서양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때 패초(牌招)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1년반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1647년 말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起用)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 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가, 1650년(효종 1)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고, 뒤이어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 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六曹)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 정책 대결이 표면화되었던 때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하였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지만, 곧 형 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죽었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서인(西人)이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중도적 노선을 견지(堅持)하였기 때문에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지화(鄭知和)

1613(광해군 5)∼1688(숙종 14). 20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예경(禮卿), 호(號)는 남곡(南谷).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손으로, 이조참판 광경(廣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돈녕부도정 민유경(閔有慶)의 딸이다. 영의정 태화(太和)와 좌의정 치화(致和)와는 4촌간이다. 이정남(李井男)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 지화(至和)의 셋째아들 재희(載禧)를 양자로 하였는데, 재희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 1637년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있으면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용(任用)되었다. 이듬해 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세자의 정조(正朝) 문안을 겸해서 귀국한 뒤, 홍문관수찬• 교리• 응교,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다가 1649년초 원주목사로 나갔으나, 효종이 즉위하면서 곧 세자시강원보덕에 임명되어 8개월 만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안으로는 승지• 대사간 등을 거치는 한편, 밖으로는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다가 1664년(현종 5)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1674년 좌의정이 되기까지 각 조(曹)의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 역임하면서,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나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73년 영릉(寧陵)의 봉심(奉審)을 잘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削奪) 당하고 한성 문밖으로 출송(黜送)되는 일이 있었다. 약 1년간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에 좌의정으로 기용(起用)되었으나, 곧 신병을 칭하여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았다. 현종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복상(服喪)문제가 일어나(제2차 禮訟)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화(禍)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화• 치화 등 친족들과 함께 서인(西人)이면서도 항상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남인(南人)들의 극단적인 처벌론을 무마하면서 그 스스로 화를 면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서인들을 죽음의 처지로부터 구하여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680년(숙종 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지내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의 졸기에서 “본성이 성색(聲色)과 사죽(絲竹)을 즐겨서 분대(粉黛)가 그 옆을 떠나지 않았고, 연희(宴嬉)에 빠져서 공무(公務)를 돌보지 않았으니, 여러 경상(卿相)의 자리를 지냈어도 이룩한 바가 없다.”고 비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으면 곧 관직을 내놓고 집에 들어앉았고, 제2차 예송(禮訟) 때에는 송시열을 죽음에서 구하는 데 크게 힘썼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정재숭(鄭載嵩)

1632(인조 10)∼1692(숙종 18). 21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자고(子高), 호(號)는 송와(松窩). 영의정을 지낸 태화(太和)의 아들이다.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60년(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62년 지평이 되고, 그 이듬해부터 정언• 문학• 교리• 수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6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특진(特進)되었다. 이어서 동부승지, 1673년 병조참지, 1676년(숙종 2)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1679년 개성유수를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이듬해 이조판서• 좌참찬• 대사헌• 우참찬• 병조판서• 호조판서, 이어 공조판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1685년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노환(老患)으로 사직(辭職),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정석오(鄭錫五)

1691(숙종 17)∼1748(영조 24). 23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유호(攸好). 좌의정 치화(致和)의 증손으로, 혁선(赫先)의 아들이며, 효선(孝先)에게 입양되었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 수찬• 교리•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지평으로 있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과 더불어 소론(少論) 계열(系列)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탄핵, 신임사화를 주도하였으나 1725년 영조 즉위로 노론(老論)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삭출 당하였다 2년 후 정미환국(정미(丁未還國))으로 세자시강원 사서로 다시 기용된 뒤, 응교• 승지• 동지의금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36년(영조 12)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의 부사(副使)로서 정사(正使) 함평군 홍(咸平君泓)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판서를 거쳐 1746년 우의정에 특진, 곧 좌의정(左議政)에 승진되고, 1748년 영돈녕부사로서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가 되어 효현황후(孝賢皇后)시호 올린 것을 진하하고 연공(年貢)을 진헌(進獻)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가던 중 병사(病死)하였다.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정홍순(鄭弘淳)

1720(숙종 46)∼1784(정조 8). 24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의중(毅仲), 호(號)는 호동(瓠東). 영의정 태화(太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판 석삼(錫三)이다. 1745년(영조 21)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지평• 교리• 이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고,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財政) 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1762년 호조판서로서 예조판서를 겸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상(喪)에 장의(葬儀)를 주관하면서, 장헌세자의 의복과 금침에서부터 악모대리(幄帽帶履) 등 미세한 것까지 한쪽씩 떼내어 그 때의 문부(文簿)와 함께 봉하여 수자(守者)를 단속하고 이를 보관하였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한 다음해에, 앞서 세자의 장례 때 상례(喪禮)의 풍부 여부를 알고자 당시 예조판서였던 그를 대령(待令)하게 하므로, 그는 곧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하여두었던 것을 내어다 보이자,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겨 곧 우의정에 제수하였으며,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정승(政丞)이 된 뒤에도 미세한 일에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여, 어느 때인가 자기집을 수리할 때 공인(工人)과 더불어 일삯으로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 이를 본 그의 아들이 “어른의 신분으로 천한 공인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까?”하니, 그는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인데, 내가 삯을 과히 주면 온 나라의 예가 되어 빈한한 백성들이 많은 곤란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또, 한때 그에게 파전(破錢)한푼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땜질하여 붙이는 데 두푼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두푼을 들여 한푼을 얻으면 오히려 한푼이 손해가 나는데 어째서 공(公)은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나 개인은 한푼을 잃었어도 나라에는 한푼이 이익이 되니 어찌 이익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한다. 시호(諡號)가 정민(貞敏)으로 내려졌다가, 뒤에 충헌(忠憲)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정존겸(鄭存謙)

1722(경종 2)∼1794(정조 18). 25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 좌의정 유길(愉吉)의 8대손으로, 우의정 치화(致和)의 5대손이며, 문상(文祥)의 아들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다음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54년에는 횡성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교리•승지 등을 지냈다. 승지로 있을 때 1761년 4월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영조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영조는 세자의 서유(西遊)에 관여한 심발(沈발)• 유한소(兪漢簫)• 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罷免)시켰는데 이때 그도 파면되었다. 그 뒤 다시 등용되었으나 1772년 당론을 주장하였다 하여 북청으로 정배(定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관계에 복귀, 이조판서를 지냈다.
1775년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세손을 보호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781년 《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의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다시 우의정으로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하였다. 1791년 영의정에 이어 영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철저한 시파(時派)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정원용(鄭元容)

1783(정조 7)∼1873(고종 10). 26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동만(東晩)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기세(基世), 목사 기년(基年), 부사 기명(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 홍문관부응교• 이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내다가, 1821년 서북지방에 괴질(怪疾)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궤02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政界)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管掌)하였고,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權門勢家) 출신(出身)으로 20여년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저서(著書)로는 《경산집》 40권과 《황각장주 黃閣章奏》 21권, 《북정록 北征錄》 10권, 《수향편 袖香編》 3권, 《문헌촬요 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정범조(鄭範朝)

1833(순조 33)∼1898. 28世.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 자(字)는 우서(禹書), 호는 규당(葵堂). 우찬성 기세(基世)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되고, 1860년 대교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좌참찬에 승진한 뒤 1865년 이조참의, 1869년 성균관대사성• 규장각직제학•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875년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9년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 다음해 다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당상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사대교린사당상(事大交隣司堂上)•감공사당상경리사(監工司堂上經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병조판서 및 한성부판윤, 그리고 1886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와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부터 수년간 여러 차례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갈(枯渴)된 국고(國庫)를 맡아 타개책(打開策)에 진력(盡力)하였다. 1892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左議政)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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