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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32세 연수
작성일 2011-05-11 (수)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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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실기2편

진산세고서(晉山世稿序)

하루는 진산군(晉山君 : 姜希孟)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형이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형님은 모두 글을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 문집(文集)을 만들지 못해 매양 드러내어 빛내려고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다행히 시문(詩文) 약간 편을 찾아내어 책 한 질을 만들어 진산세고(晉山世稿)라 이름 붙이고 얼마 후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冑)와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두 정승의 서문을 받았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선부군(先府君)께서 평소 높은 풍도와 덕의(德義)를 높이 받들어야 한다고 여러 자손에게 말한 분은 오직 공(公)뿐이었으니 한 말씀 써서 유고(遺稿)를 빛나게 하고 평소의 의리를 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강공(姜公)의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이제 그 유고를 읽어보니 감개무량하여 글을 잘못한다고 사양하기가 어렵다.

대저 근원이 먼 물은 그 흐름이 반드시 길게 마련이고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지와 잎이 반드시 무성하게 마련이다. 공의 선세에서 덕(德)을 많이 쌓아 여경(餘慶)이 이어져 유명한 공경(公卿)이 전후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비록 통정공(通亭公:姜淮伯)을 뵙지 못했으나 지금 그 유고를 읽어보니 그분의 문장(文章)과 사업을 상상할 수가 있겠다. 옛날 완이재(玩易齋:姜碩德)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내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좌우에서 모셨는데 공은 영리함이 절륜하고 널리 알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자집(子集)을 꿰뚫지 못한 것이 없어 소견이 더욱 높고 조예(造詣)가 더욱 깊었다.

지은 시문은 예스럽고 간결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어 비록 짧은 조각 글이라도 세속을 따르지 않았다. 평소 집에 있으면서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으면서 좌우에 책을 쌓아놓고 읽으셨다. 세종(世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장차 크게 쓰려고 하여 세상에서 공보(公輔)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니 시문은 여사(餘事)였을 뿐이다.

인재(仁齋:姜希顔)에 이르러서는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이 정미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였으며 서화(書畵)가 절묘해서 한 세상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공의 문장과 학문은 서화에 가려서 아는 사람이 드물다. 공은 성품이 단아하고 깨끗하여 벼슬길에서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지위가 덕(德)에 차지 않았는데 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역사에서 보건대 예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백세에 향기를 전한 자는 오직 송(宋)나라 삼소(三蘇)가 있을 뿐인데 아버지 소순(蘇洵)의 문장은 종횡(縱橫)의 기운이 있고 아들 동파(東坡)의 시는 헐뜯는 바가 많아서 후세 사람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 이 문집을 보건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넘쳐서 온유(溫柔) 돈후(敦厚)한 뜻이 말마다 넘쳐나니 아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겠다.

진산상공(晉山相公)은 선대의 덕을 이어 일찍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공신(功臣)에 책봉되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선세에서 쌓아온 여경(餘慶)이 공에게 와서 크게 나타나고 공명(功名)과 부귀(富貴)가 공 한 몸에 다 모였으니 근원이 멀고 뿌리가 깊으며 덕이 두터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선세의 시문이 인멸(湮滅)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장차 인쇄하여 오래 전하려고 하는데 나는 그 선세의 덕업(德業)과 문장이 오래도록 빛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 않으니, 이 문집이 후세에 전하는 것이 어찌 내 말을 기다려서이겠는가?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 서(序)함.

4) 영상(영의정) 신숙주 공을 제사지내는 글

祭領相申公叔舟文

嗚呼乾坤淑氣轇轕不停粲爲三光流爲風霆麒麟鳳凰慶雲景星其鍾於人最秀且靈爲賢爲聖廼踐其形輔相天地䌤綸大經赫矣相公應期挺生奇偉不常鳴世之英量包宇宙學洞今昔帝德王功文謀武略以博其聞以崇其德發而爲用措諸事業適際時艱陽九之厄叶贊眞人亨屯拯溺再造王家多于茂績指誓山河與同休戚兩扶日馭躋于璇極扶顚定危妥如盤石四圖雲臺累踐台司正笏立朝百僚是師訐謨遠猷明若蓍龜潤色王猷文章灝畺折衝千里夷狄震疊身都將相獨佩安危甘有餘年治極隆熙自東方來世有公卿如公之業夫孰與京惟國惟民倚如柱石胡不憖遺遽就窀穸訃聞輟朝鑑亡是惜不相杵嘆其無祿矧伊吾儕同擢制科玉署相從朝夕切磋功名之就雖愧於公管鮑知心庶幾追蹤今其永違天曷故焉哭望殯帷有淚知泉恭奠一酌叙哀忱英靈不眛庶氣來歆.

蓬原鄭昌孫

아! 천지간의 다사로운 봄기운이

아득아득 멈추지 않아

차란히 빛나 해⋅달⋅별이 되고

흘러 바람이며 천둥소리 되고

기린과 봉황

경사로운 구름⋅큰 별 되었네.

그 기운이 사람에게 모여

가장 빼어나고 신령스러워

현인도 되고 성인도 되어 이에 그 모습 따랐네.

天地를 도와

벼리와 大道 되었네.

빛나도다 상공은,

때맞추어 날 때부터 뛰어났네.

기이하고 잘나서 여느 사람과는 달라

세상에 떨칠 영웅이었네.

도량은 우주를 끌어안고,

학문은 고금을 꿰뚫었네.

제왕의 어진 덕과 군왕의 공업을,

문무의 지략으로

그 견문을 넓히고

그 덕을 높였네.

펴서 쓰이게 되고

사업에서 베풀었네.

마침 어려운 시절

재화(災禍)의 액운을 만났도다.

진인을 협력하여 도와 어려움을 형통케 하고

물에 빠진 일 구했도다.

왕가를 다시금 세우기에

그 업적 컸도다.

산하를 두고 맹세했네,

국가와 고락을 함께하기를!

둘이서 임금을 부축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네.

넘어진 이를 부축하고 위태로운 걸 안정케 하여

반석같이 편안케 하였네.

네 번이나 능운대에 초상을 그렸고

여러 번 태사(台司)에 오르고

홀(笏)을 바로 하여 대궐에 들어가면

모든 신료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겼고

크나큰 의론이며 원대한 계책은

시초점 거북점처럼 분명하였네.

임금의 계책을 손질하매

문장은 한없이 엄숙하였네.

적의 침입을 막느라 천리를 달리매

오랑캐들이 두려워 떨었네.

몸소 대장 정승을 거느렸고

국가 안위 홀로 마음에 간직했네.

스무남은

해 정치는 극히 성하고도 밝았네.

우리나라에

대대로 공경 있다지만

공과 같은 업적

대저 그 누가 높을까?

오직 나라와 백성이

기둥인 양 주추인 양 의지하였네.

어찌하여 머물 생각 않고

갑자기 무덤으로 갔는가?

부음 듣고 조회를 폐하니

본보기가 없어지니 이것이 애닯도다.

서로 어긋짐을 안타까워 말고

그 복 없음을 한탄하라.

더구나 우리들은

임금 친히 출제한 과거에 같이 뽑혀

홍문관에서 같이 지내

아침저녁으로

서로 학문과 덕행 닦았었네.

공명을 이룩함이야

공에게 비록 부끄럽지만

관중(管仲) 포숙(鮑叔) 같은 지기지우(知己之友)로는

거의 뒤따름직한데

이제 영영 헤어지게 되니

하늘이 무슨 까닭인가?

통곡하며 빈소 바라보니

샘처럼 솟는 눈물뿐.

공경스럽게 한 잔 술 올려

슬픔과 정성 펴오니

영령이여! 앎이 있다면

아마 와서 흠향하리!

봉원(蓬原) 정창손(鄭昌孫)

5) 영상(영의정) 신숙주 공의 죽음을 슬퍼하다

輓 領相申公叔舟

早年攀附際明良 將相宏才壓廟堂 圖畵雲臺參翊戴 扶持日轂上穹蒼 累朝勳業誰能幷 餘事文章獨擅塲魏鑑忽亡今己矣 那堪爲君倍悲傷.


天挺人豪間世雄 遭逢列祖盡孤忠 運籌帷幄謀猷密 調鼎巖廊治化隆 杖節東溟宣盛德 蒐兵北塞定戎功從誰復見經綸手 執紼都門淚洒風.

蓬原鄭昌孫.

일찍부터 영특한 임금을 섬겨

공명을 이루니

명장(明將)이요 재상인 뛰어난 인물로

조정에서 으뜸이었네.

능운대에 화상 그렸고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참여했고,

임금 수레 따르느라

푸늘 하늘에 올라갔네.

여러 임금 섬긴 공훈

뉘 능히 그와 견줄꼬!

문장(文章)으로 독무대 차지함은

여사(餘事)이었네.

높은 본보기 문득 사라져

이젠 그만이니

그대 위해 곱절 서러움

어이 견디리오?


하늘이 빼어낸 인간 중 호걸이요

어쩌다 한 번 나는 영웅이

여러 임금님을 만나

외로운 충성 다하였네.

임금 곁에서 계책을 운영하매

계책 세우기 꼼꼼도 하고

조정에서 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매

정치 교화 높았네.

부절(符節) 받들고 동해(東海:日本)로 가

거룩한 덕을 베풀었고

북방 요새에서 군인을 모아 오랑캐 진압한 공을 세웠네.

그 뉘게서 다시 볼꼬,

경륜(經綸) 솜씨!

도성문에서 상엿줄 잡으니

눈물만 바람결에 흩뿌려지네.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6) 봉원부원군 증시 충정공 졸기(蓬原府院君 贈諡 忠貞公 卒記)

○.成宗十八年(丁未/1487)一月二十七日戊辰領議政蓬原府院君鄭昌孫卒。 輟朝、弔、祭、禮葬如例。 昌孫字孝中, 東萊人, 中樞院使欽之之子也。 自幼好讀書, 永樂癸卯中司馬試, 宣德丙午中文科, 補權知承文院副正字, 尋遷集賢殿著作郞, 累陞至校理。 正統辛酉授司贍署令, 壬戌陞拜試典醬副正, 移集賢殿應敎。 乙丑拜司憲執義, 慷慨直言; 丙寅以言事左遷, 爲軍器副正。 丁卯拜直藝文館, 中重試, 授集賢殿直提學。 戊辰陞副提學, 參修《高麗史》、《世宗實錄》。 景泰庚(子)〔午〕拜承政院左副承旨, 轉右承旨, 辛未陞嘉善司憲府大司憲, 大振朝綱。 壬申遷藝文提學, 癸酉世祖靖難, 擢授資憲吏曹判書。 甲戌階正憲, 乙亥世祖卽位, 加崇政, 拜議政府右贊成, 賜推忠佐翼功臣號, 封蓬原君。 丙子加崇祿, 時成三問、朴彭年等謀亂, 昌孫上變, 加賜勁節功臣號, 陞輔國崇祿蓬原府院君兼成均大司成, 蓋典文衡也。 俄陞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 天順丁丑陞左議政。 戊寅丁母憂, 婦人例無停朝, 上特命停朝市一日, 示異恩也。及葬, 昌孫在墓廬, 一不至私第, 世祖聞之, 遣直提學徐岡賜內醞及素饌, 命居京家, 勿歸墓廬, 然守墳如舊。 世祖將幸平安道, 欲以昌孫留守京都, 特起復爲領議政。 上箋辭。 御書諭曰: “予之於卿, 猶左右手。 將率百官, 親往起復。” 俄停巡幸, 昌孫又上箋固辭之。 庚辰服闋, 世祖引入內殿慰諭, 至賜段衣一襲, 封府院君。 辛巳拜領議政, 壬午以事謫礪山郡, 旋召封府院君, 特賜宴慰之。 成化戊子睿宗卽位, 南怡等誅, 賜推忠定難翊戴功臣號。 己丑上卽位, 以院相參決庶務, 辛卯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 以年七十致仕, 不允。 壬辰賜几杖, 乙未拜領議政, 乙巳以老辭, 復封府院君。 至是卒, 年八十六。 諡忠貞: 事君盡節 ‘忠’, 直道不撓‘貞’。 有子价、偁、佸, 壻金礩。

【史臣曰: “昌孫天性恬靜簡素, 不營産業, 家居索然。 關節不到, 雖至親不敢干以私。孝於親, 信於朋友, 爲相三十餘年, 淸直一節, 終始不渝。 及年齒高邁, 心志昏亂, 議事之際, 雖或錯誤, 而略無迎合阿比之私。 每朝廷之會, 起居顚躓, 猶不辭職, 人竊譏議。”】

訃聞, 傳曰: “淸貧宰相, 優給賻物。”

○.成宗 199卷, 18年(1487 丁未 / 명 성화(成化) 23年) 1月 27日(戊辰) 1번째기사

蓬原府院君 鄭昌孫의 卒記-[태백산사고본]


成宗十八年(丁未/1487) 一月二十七日(戊辰)에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와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정창손의 자(字)는 효중(孝中)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인데, 중추원사(中樞院使)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영락(永樂) 계묘년(世宗5年/1423) 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선덕(宣德) 병오년(世宗8年1426)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곧 집현전 저작랑(集賢殿著作郞)으로 옮기고 여러 번 승진하여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정통(正統) 신유년(世宗23年1441)에 사섬서 령(司贍署令)에 제수되고, 임술년(世宗24年1442)에는 승진하여 시전장 부정(試典醬副正)에 임명되었다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옮겼다. 을축년(世宗27年1445)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임명되어 강개(慷慨)하게 곧은 말을 하였고, 병인년(世宗28年1446)에는 언사(言事)로 좌천되어 군기 부정(軍器副正)이 되었다. 정묘년(世宗29年1447)에는 직예문관(直藝文館)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제수되었고, 무진년(世宗30年/1448)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여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수하는데 참여하였다. 경태(景泰) 경오년(世宗32年1450)에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옮기고 신미년(文宗元年/1451)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조정의 기강(紀綱)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임신년(文宗2年/1452)에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기고, 계유년(端宗元年/1453)세조 정난(世祖靖難)에 뽑혀서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고, 갑술년(端宗2年/1454)에는 자급이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을해년(世祖元年/1455)에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가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고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를 받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으며, 병자년(世祖2年1456)에는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때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난(亂)을 꾀하자, 정창손이 변(變)을 고(告)하여 경절 공신(勁節功臣)의 칭호가 더 내려지고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이었다. 곧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올랐다가 천순(天順) 정축년(世祖3年1457)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올랐다. 무인년(世祖4年/1458)에는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예(例)에 부인은 정조(停朝)가 없었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조시(朝市)를 하루 정지하여 특별한 은혜를 보였다. 장사지냄에 미쳐 정창손이 묘려(墓廬)에 있고 한 번도 사가(私家)에 오지 아니하였는데, 세조가 듣고 직제학(直提學) 서강(徐岡)을 보내어 내온(內醞)과 소찬(素饌)을 내려 주었으며, 서울 집에 있고 묘려(墓廬)에 돌아가지 말도록 하였으나 예전대로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세조가 장차 평안도에 거둥하려고 하면서 정창손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하려고, 특별히 기복(起復)하여 영의정(領議政)을 삼았으나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자, 어서(御書)로 유시(諭示)하기를,

“나에게 경(卿)은 좌우의 손과 같으니 장차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기복(起復)하도록 하겠다.” 하고, 갑자기 순행(巡幸)을 정지하였는데, 정창손이 또 전문을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경진년(世祖6年/1460)에 복(服)을 마치자 세조가 내전(內殿)에 불러 들여서 위로 하고, 단의(段衣) 한 벌을 내려 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신사년(世祖7年/1461)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임오년(世祖8年/1462)에 어떤 사건으로 여산군(礪山郡)에 귀양갔으나 곧 불러서 부원군에 봉해지고 특별히 잔치를 내려 위로해 주었다. 성화(成化) 무자년(世祖14年/1468)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남이(南怡) 등을 죽일 적에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칭호가 내려 지고, 기축년(成宗卽位年1469)에 임금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였다. 신묘년(成宗2年/1471)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命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받고 나이가 70인 까닭으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진년(成宗3年/1472)에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을미년(成宗6年/1475)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을사년(成宗16年/1485)에 늙었다고 하여 사직하고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6세이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인데, 임금을 섬김에 절의를 다한 것이 충(忠)이고, 도(道)를 곧게 지키고 굽히지 아니한 것이 정(貞)이다. 아들은 정개(鄭价)·정칭(鄭偁)·정괄(鄭佸)이고 사위는 김질(金礩)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정창손은 천성이 조용하고 소탈하여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였으며 집에 사는 것이 쓸쓸하고 뇌물을 받지 아니하여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감히 사사로이 간청하지 못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켜 정승이 된 지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처음부터 끝가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나이가 많아지자 정신이 혼란하여 일을 의논할 때에 비록 더러 착오는 있었으나 조금도 임금의 뜻에 맞추어 아부하는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 매양 조정의 모임에서 기거 동작하는 데에 넘어지면서도 오히려 사직(辭職)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가만히 비난하였다.”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전교하기를,

“청빈(淸貧)한 재상이니, 부물(賻物)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태백산사고본】

7) 수충경절 좌익정난익대 순성명량 경제좌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사 봉원부원군 증시 충정 정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蓬原府院君兼領 經筵事 贈諡忠貞鄭公神道碑銘幷序

星嶽精靈之氣鍾於人而爲命世豪傑之才盖箕宿之精降以爲傳說爲商良弼崇嶽之靈降而爲申伯爲周賢佐求之於今蓬原鄭忠貞公弼亮 五朝功名勳烈之盛可以伯仲於傳申掎歟盛哉公諱昌孫字孝仲皇曾祖諱良生重大匡蓬原府院君皇祖諱符嘉善大夫漢城府尹 贈議政府左贊成皇考諱欽之資憲大夫中樞院事諡文景公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萊山府院君皇妣貞敬夫人崔氏全州望族刑曹典書丙禮之女以壬午三月甲午生公生而器度與凡兒逈異及長就學博聞强記嗜讀書能文章癸卯中司馬試宣德丙午中第補承文院正字俄遷授集賢殿著作郞歷博士修撰轉至校理皆帶經筵知製敎世宗設集賢殿置院二十人抄選一時文學之士充之備顧問演綸綍高步花磚昵承睿眷時人擬之登瀛洲世宗甞留意於資治通鑑謂其箋釋未盡句讀不明命文士撰訓義皆才學識鑑之士分科責成繙閱紬復各盡所長而纂修之功公實居多己未丁外憂服闋授司瞻寺令陞集賢殿應敎帶經筵春秋館又命文士聚於集賢殿撰上自唐虞三代下至宋元及我國聖帝明王名臣碩輔善政善敎可爲後世法者編爲巨秩凡數百卷名曰治平要覽纂修之功公亦居多世宗末年稍違豫文宗在東邸視事朝官言事者必上封章乃達時公與李文烈公季甸在集賢殿屢封章極論時政得失有一二同列止之曰自古喜論事者終必陷禍况侍從講論德義啓沃輔道而己至於諫諍非職公與文烈大笑曰人各有心論事之敗之榮不如含默之耻之深遂率下僚抗疏極陳餘數十上 世宗嘉之乙丑擢司憲府執義慷慨骨骾知無不言前此公之伯氏貞節公甲孫長憲府激濁揚淸直道不撓風節凛然人比之獨擊鶻今公正色立朝謇諤亮直有乃兄風一時物論多之丙寅以言事遷左爲軍器副正移直藝文館丁卯中覆試授集賢殿直提學兼經筵春秋館戊辰五月擢副提學館職如舊 世宗命臣鄭麟趾等撰修高麗史公以編修官專掌編次不幸書未進御而陟遐 文宗命史局畢撰公益勤不怠庚午擢授承政院左副承旨兼知禮曹事轉至右出納惟允八月進高麗全史賜鞍馬表裡辛未拜司憲府大司憲階嘉善大振臺綱論事切至不避權貴人皆畏憚曰前日博擊鄭中丞今復爲憲長矣兼世子左副賓客壬申遷藝文提學同知春秋館撰 世宗文宗實錄賜鞍馬顯陵陟遐幼冲在立權奸用事國勢疑危公奉公守正癸酉十月 世祖炳幾靖難謂左右曰當今之時直亮簡正無如鄭某者擢爲吏曹判書陞資憲公之藻鑑淸識甄別品題皆得其宜性又廉潔雖權勢赫然而門庭蕭索關節不到士林歎服乙亥 世祖卽位謂政府大臣宜用讀書稽古持大軆者擢公爲議政府左贊成兼判吏曹策勳佐翼功臣三等封蓬原君丙子六月成三問等潛謀不軌公知其某上燮當是時逆黨盤結禍難之作不朝則夕賴公剪除無有芽於間者策勳 佐翼二等加輔國崇祿大夫蓬原府院君兼成均館大司成 世子貳師盖典文衡也十月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丁丑陞爲左時大夫人年高九袟公至誠榮養雖隆冬盛暑不廢定省朝謁之暇必具冠帶陪侍左右歡欣怡悅大夫人平反一笑然後退一國皆稱其孝戊寅丁憂哀毁過節 世祖遣近臣吊慰賻贈有加特停朝市一日前此婦人無停朝之例此所以重公示異恩也及葬廬墓不至私第 上遣官慰諭五十後氣力漸衰愼勿廬墓 世祖將巡幸平安道起復爲領議政留守京都上箋辭不允又遣都承旨曺錫文慰解之公固辭御札曰子之於卿猶左右手假如一手安一乎否安手執他面有所接物則否手其能自以爲不安而貽患於身乎大義如此不必多言若不得則將率百官親徃起復良相體此公猶不就職俄停巡幸庚辰服闋 上引入內殿天語溫諄丁寧款至賜衣一襲封蓬原府院君辛巳拜領議政府事領藝文館春秋館事 世子師壬午五月以事謫礪山郡未幾召還復封蓬原府院君乙酉命諸儒分授四書五經定口訣公授尙書議論通暢多摭前儒所未發戊子 睿宗即位策定難翊戴功臣我 殿下即祚以公宿德耆艾日仕政院叅決庶務謂之院相兼領經筵辛卯 賜佐理功臣尋以七十乞致仕不允壬辰遣臣 賜几杖乙未拜領議政至是公三爲首相縉紳士大夫相與慶於朝曰善人復相矣公以盛滿屢乞辭 上曰三公之重非如卿老成無以鎭之不允公居廟堂垂紳正笏不動聲色屹如山嶽年俯九袟朝庭蓍舊無出其右人比之宋丞相文彦博云乙巳固辭封府院君丁未遘疾 上命賜藥餌遣內醫診視問訊不絶正月戊辰卒于正寢享年八十有六 上震悼墮淚良久進素饌輟朝市三日遣中使臨吊 上曰蓬原家素淸貧凡喪葬所乏具由輒聞母使有缺賻 贈倍加太常易名忠貞聞公之卒士林莫不痛悼曰賢宰相亡矣至於牛童馬卒莫不嘆惜公資性簡嚴高邁廉公正直學問該博文章典雅筆法絶妙爲一代之冠平生不事産業雖位極人臣居家索然居官履事明白正大贈遺無所愛請謁不得行人不敢干以私友於兄弟信於朋友親戚故舊喪葬婚姻無不賑卹接人以恭雖下士之賤有來候者必於門外送迎天性然也 世祖深加眷注甞曰予之敬卿無異叔父公如進爵上必改容下御座曰此王非君臣大義乃展私禮也仍宣喩在左群臣公性不能酒座 上爲設醴必親甞賜之至年深難於趨拜或命免拜上殿其尊禮敬重如此公立朝六十二年主試圍者數十掌銓衡者四年三爲首相係國家輕重者三十餘年居寵思危克全終始功名福祿之盛今古無比擧國皆稱道德之首配淸風郡夫人鄭氏承寧府少尹持之女生三男四女長曰价僉知中樞次曰偁僉知中樞次曰佸中乙酉科爲議政府左議政女長適兵曹判書李樺次適上洛府院君金礩次適趙允璧次適崔漬僉知娶郡守洪瑞從之女生二男二女男長奏咸主簿次啓咸司正女長適司果李克文次適効力副尉尹儉次僉知娶司勇崔季謙之女無子贊成娶府使李潔之女生一男曰宗輔奉事女三長適奉事李禧益次適直長沈浻次適叅奉尹堞上洛生五男曰義童僉樞曰禮童主簿曰智童僉正曰誠童縣監曰利童司果女一宗室富林君湜崔漬生二男曰緇縣令曰瀜監察女適部長尹超僉正生二男曰瑛曰珪生員女長適生員李詩讃次適呂承堪次適幼學朴成亨次適將仕郞李長源餘幼曾玄孫七十餘人是年四月壬申葬于廣州之西芳桋洞癸坐丁向之原夫人先公卒塋域在西崗相踞不過百餘步旣葬明年戊申正月諸孤欲立神道碑索銘於居正嗚呼居正尙忍銘諸居正中戊申進士登丁丑覆試皆出公門下公之在集賢殿居正叨叅末席者數年及公之三入廟堂居正三爲叅贊再爲贊成忝僚貳者六將十年攀附驥尾於公之德之風獲聞緖餘服膺景慕今則山頹梁壞無

復可仰嗚呼哀哉銘曰

天地絪縕奎璧晶熒公乃挺生公又蜚英光風霽月豁乎心胷泰山北斗巍乎儀容早際昌辰風虎雲龍歷事五朝千載奇逢踐揚臺館登金步玉三長巖廊四圖獜閣訏謀贊襄經綸黼黻以亭以毒乃設乃施何適不可時措而宜耆舊老成潞國其人功名終始汾陽其倫曰鳳其祥匪龜而神人思柱石國倚塩梅何天不慗遽爾山頹魏鑑雖土漢礪可倚曰忠曰貞昭載諡誄有欝廣陵有截玄宮有崇者碑有聲渢渢.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舘大提

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徐居正撰

弘文館副校理金壽童書並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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